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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Dec 04. 2023

부지런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백수,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일하지 않는 청년 무직자인 니트족, 부모 집에 얹혀사는 캥거루족. 나란 인간을 설명하기 좋은 이름들이 많이 생겼다. 나의 은둔 생활이 몇 년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시작은 스무 살, 대학교를 휴학하면서부터다.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가 집으로 숨어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들은 내가 히키코모리라는 것을 모른다. 어디서도 말하지 못한 내 이야기를 구태여 꺼낸 이유는 이렇다.


부끄러웠다. 방구석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사람 구실 못하고 있는 내가, 부모님께 손 벌리고 있는 내가, 어엿한 직장 하나 가지지 못한 내가, 돈벌이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가진 게 쥐뿔도 없는 내가, 나이만 먹은 내가, 방구석에서 한가롭게 글이나 쓰고 있는 내가, 노동의 가치를 모르는 내가,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내가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내가 가진 게 많음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내게 죄를 지었다. 가족과 사회에 빚을 지었다.


이런 생각들로 암울하기만 했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자기 부정과 무기력과 우울의 그늘로부터 지켜 준 건 단정한 생활습관과 건강한 취미들이었다. 히키코모리인 내가 집안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활동 반경은 비록 좁지만 오늘 하루 내가 해야 하는 작은 일들에 충실했다. '돌봄'이라는 기본에 충실했다. 잘 먹고 잘 자고 깨끗한 몸과 단정한 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나를 지킬 수 있다.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는 일상이 지켜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기본이 흐트러지면 일상도 흐트러진다. 언제나 내가 나로 있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두 기본에 있다.


내가 스스로 치유하고 나와 세상에 대한 애정을 다시 갖게 되기까지, 내가 집안에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부모님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걸 안다. 생명의 위협, 생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안다.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걸 안다. 내게 주어진 오늘이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를 깨달았다.


그렇지만 지난 시간을 후회로만 물들이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에 때가 있듯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은둔의 시간은 내면으로 깊게 침잠하는 시간이었다. 과거를 후회로 마주하기보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뉘우쳤으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보려고 한다. 때로는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고찰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약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억지로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면 나는 정말 무너졌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버티고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하냐'며 자신을 몰아세웠다면 나는 정말 벼랑 끝에 내몰렸을지 모른다. 불행과 힘듦을 저울질하고 나와 타인의 삶을 비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부모님께 좋은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사회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 다 좋다. 다 좋은데, 일단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나 하나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베풀고 살겠는가? 나 하나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다른 생명이 귀한 줄 알겠는가? 모든 것은 자기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한참 몰라서 돌고 돌아왔다.


나로 일어서는 것부터가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당장 집밖으로 나가지 못해도 집 안에서, 방 한구석에서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방구석에서 혼자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했듯이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손을 건네고 싶었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꼭 얘기해 주고 싶었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결심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붙잡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가장 먼저 내게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아니면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글에는 힘이 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잠재적인 힘이 있다. 글을 쓰며 내가 쓴 글이 나의 또 다른 오늘이 되는 걸 경험했다. 그래서 글의 힘을 빌려 보기로 했다. 내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기로 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기로 했다. 더는 과거에 얽매여 있을 시간이 없다.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할 시간도 없다. 내게 주어진 건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사람에겐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있다. 집을 좋아하고 오랜 은둔 경력을 자랑하는 내가 언제 다시 방으로 숨어들고 싶어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나로 살고 있느냐이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든 나로 머물 것을 나 자신과 약속한다. 부족하지만 사람들을 돕고 살아갈 것을 약속한다. 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나도 이제 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부지런한 생활과 습관으로 단단히 다져온 건강한 에너지를 나누고 싶다. 이제는 빚을 갚을 차례다.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별에 와서 빚을 지고 살아간다. 둘레 생명들을 해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며, 나의 몸과 정신 건강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작지만 내 역할을 다하며 이 땅에, 이 별에 잠시 머물다 가고 싶다.



나는 이제 집 밖을 나설 준비가 됐다.

문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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