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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보기 Dec 10. 2024

<<사나운 애착>> 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 글항아리, 2021년> 을 읽고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처음 만난 건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딱 마흔 살이 되던 해이기도 했다.


칼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다는데, 한 정신과 전문의의 말대로 ‘이제는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내면의 신호가 실제

내 심장을 두드렸던 것 같다. 더불어 당시 결혼 10년 만에 친정 옆으로 이사 온 워킹맘이기도 했던 나는 당시 친정엄마와 매일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노년에도 변함없이 가부장적인 마인드와 남아선호사상에 갇힌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의 고통이 다시금 떠올라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고닉의 또 다른 에세이

 <짝 없는 여자와 도시, 2015>를 보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건 미완의 과제로,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완결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성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어린 시절이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녀의 책 제목부터가 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어쩌면 어린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치유 받을 수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설명> 비비언 고닉 저, 글항아리, 2021년 발행 표지(출처:구글 이미지)


  작가 고닉의 작품들에는 실제 어린 시절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여러 장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나운 애착>은 1987년 미국에서 발표된 회고록 형식으로, 작가의 슬프고, 때론 부끄럽고, 고뇌했던 경험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아시아 여성으로서 내가 바라보는 미국 뉴요커 시민권자는 보다 상위 계층으로서 진일보한 모녀 관계를 보여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렸다.


<사진 설명> 나무와 꽈리 드로잉 연습, 2024.11.


<사나운 애착> 여성 간 유대관계 안에서의 다양한 애착 “엄마 vs 옆집 여자”


  작가는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통해 미국 내 유대인 이민자 가정의 딸로서 뉴욕에서도 브롱크스라는 가난한 이민자 동네에서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곳의 특징적인 가족 형태와 여성의 삶, 엄마와의 관계를 통한 사춘기 여자아이의 성장기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이 과정은 미국 내 노동 계급의 삶이란 어떠한지,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부재한 편모슬하의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여성이 본 가족, 특히 그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려는 엄마의 삶에 집중해 바라본다. 엄마와 딸 사이는 누구보다 밀접하고 닮아있지만, 세대 변화, 문화적 취향의 차이 등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되기 쉬운 관계다. 그녀는 ‘사나운 애착’이라는 책 제목처럼 자신도 엄마와의 관계에서 동일시와 투사, 질투, 연민 등 다양한 심리적 갈등으로 얽혀있는 애착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엄마와 딸은 애증의 관계’라는 한국적 통념이 미국과 같은 곳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매번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구는 엄마, 작가는 과하게 느껴지는 엄마의 애도 표현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문제는 엄마가 당신의 결혼 생활에 내려진 축복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갖는 바람에 그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는 세상의 모든 결혼을 무시하고 폄하했다는 점이다. 엄마가 나에게 백가지 방식으로, 천 가지 방식으로 가르쳐준 유일무이한 교훈이란 여자의 삶에선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이었다. 아빠의 사랑은 진실로 경탄할 만한 자산이었고 엄마의 권태와 불안을 보상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권태와 불안의 원인이기도 했다. (중략) 엄마의 사전에 있는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지난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엄마에게

죽은 남편과의 사랑은 종교와도 같았다. 엄마이전에 연약한 인간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작가는 또한 가까운 친구‧이웃들과의 만남‧대화를 통해 이런 엄마와의 관계, 자신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일화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옆집 여자 ‘네티’는 이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이자 작가의 정체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여성이다. ‘비유대인으로 유대인과 결혼한 여자’인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고, 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자유롭게 택해왔’으며, ‘요염하고 아리따운 외모 때문에 어딜 가나 부러움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여자’였다. 뱃속의 아들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기보다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여러 남자들에게 표현하고 발산하는 매력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요리면 요리, 청소면 청소 만능 살림꾼인 엄마와는 달리 ‘사람을 끄는 법은 배웠지만 사람을 돌보는 법은 배우지 못’한 옆집 여자 ‘네티’. 그녀는 브롱크스에서 보기 드문, 고닉에겐 호기심의 대상이자 처음 본 여성성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와 다른 방식의 자유분방함과 친밀함, 종전에는 보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다루는 장면들은 곧 작가가 엄마와는 다른 여성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의 엄마완 다른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본 ‘네티’와 자신이 느낀 ‘네티’의 차이를 통해 엄마와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러 남성들이 집을 들이고 만나는 행위를 신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가학 증상(엄마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이성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섹슈얼리티의 상징(주인공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주인공은 양쪽의 관점을 의미 있게 바라본다. 이와 동시에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이성 관계를 고민하고, 커리어를 이어가며, 고군분투한다.


<사진 설명> 자작나무, 잣나무 등 나무 드로잉 연습 2024.11.


  비비언 고닉은 <사나운 애착>을 통해 그녀의 갑작스럽고 이른 결혼과 이혼 과정, 이후 불륜 연인관계 등 다양한 이성 관계에서 봉착한 어려움을 대담할 정도로 솔직하게 밝힌다. 여기에서도 친모와 옆집 여자 ‘네티’의 영향력은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친모는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에, 네티는 이혼 과정에 깊숙이 관여되었다고 생각된다. 유대인 여성으로서 비유대인 남성과의 결혼을 앞둔 딸의 행복을 빌어주기보다는

남편을 잃은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해 ‘질투’라는 감정을 분출하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고닉은 엄마와는 전혀 다른 이성관과 결혼생활을 추구했음을 엿볼 수 있다. 네티는 고닉의 이혼과정에 촉매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편의 존재가 인생의 전부인 엄마와 같았다면 그녀는 끝까지 이혼이라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닉은 이혼했다. 글을 쓰는 자신과 화가인 남편은 예술에 대한 공통관심사 부분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남편과는 장기간 대화가 단절되곤 했고, 깊은 감정을 나누지 못했다. 부부간의 단절감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고,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이혼을 결심한다. 이는 억압된 욕망을 억누른 채 두지 않고 표출하며, 자유를 갈망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네티의 삶의 방식과 매우 닮아있다.  



노동자 계층 내 다른 세대 간 ‘모성애’의 비극

  고닉의 엄마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녀는 딸과 같은 여성으로,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 유대인으로 살아가며 어려움을 겪은 가난한 한부모 소외계층이다. 자신과는 달리 더 나은 환경에서 성장한 딸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계급과 처지에 직면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혼과 이혼을 기점으로 자유로운 이성 관계를 하며, 사회적으로도 성장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홀로 서기 시작한 고닉은 ‘엄마’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성애의 상징이 아닌 한 명의 여성이자 인간으로 객관화해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바로 윗세대 모성인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에 대한 대화내용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할머니가 이모 품에서 돌아가신 건 우리가 엄마 사랑하는 것보다 이모가 할머니를 더 극진히 사랑해서가 아니야. 이모는 할머니 지긋지긋해했어. 알잖아. 이모가 할머니 옆에 있었던 건 그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모는 결혼하고 내내 친정 근처에서 살았잖아. 그건 사랑이랑은 상관없어. 그 시절이 무조건 더 좋았던 것도 아냐. 그냥 이민자들의 삶, 노동자 계층의 삶, 다른 세대의 삶일 뿐이지.”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나는 최근 모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였음에도, 제자리에 선 40대 이상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여전히 ‘엄마의 시선’에 머물며, 크고 작은 삶의 선택을 모성에 의지한다. 가까운 친구부터 회사 동료까지, 자신의 경험과 사회적 문제, 정치적 의견을 말할 때에도 아무런 고민 없이 엄마의 조언을 따르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그건 엄마의 생각이지, 너의 생각은 아니지 않아?"라고 되물었을 때, "내 혈통이 어디서 왔겠냐?"는 반문을 들은 적도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중요한 선택과 판단을 하는 데 있어 엄마의 영향력이 큰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모친이 직업 및 진로, 임신과 출산, 결혼 등이 선경험자이자 가장 애착된 존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예전에는 임신과 출산, 집안 살림의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생애 주기에서 시대 변화에 따른 가치 추구 영역도 크게 달라져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 양육은 사회적 지원이 아직까지는 부족한 편으로, 여성 혼자 짊어져야 할 부분이 많기에 삶의 계획에 있어서의 선택과 판단은 신중할 필요가 있고, ‘모성’의 의미도 달라져가고 있음을 받아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진 설명> 북어와 벽돌 드로잉 연습, 2024,11


  고닉의 <사나운 애착>이 발표된 1987년은 내가 7살이던 시절이다. 나의 모친은 한국형 가부장제에 익숙한 전업주부로, 4남매를 낳고 기르며 자녀교육과 집안 살림에 최선을 다했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이 곧 엄마의 성취이자 권력이던 시대였다. 내가 태어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부장제 분위기가 강했던 시절이지만, 실제 대학을 다니던 2000년대는 이미 남녀에 대해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벨 훅스의 “여성이 선택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요 논점을 담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출간된 때이다. 모성으로써의 역할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역할이 중요해진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큰 다툼이 없던 우리 모녀는 나의 결혼을 기점으로 사사건건 부딪혔다. 이후 코로나19를 계기로 촉발된 제사문화와 집안의 남녀차별 문제에 대해 크게 다투기도 했다. 1년에 10회 가까이 되는 제사(자신의 조상이 아닌 남편의 조상 제사)를 홀로 감당하며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아버지나 딸들에게 풀면서도, 무조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완고함은 전통의 유교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고집스럽게 느껴졌었다. 코로나19가 끝나가면서 집안 어르신들 역시 제사를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을 고민할 때도 ‘제사를 잘 지내야 자손이 잘 된다’는 어깃장과 함께 오랜 관습을 놓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새벽부터 고생스럽지만 예의를 갖추어 조상을 모시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 모친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안쓰러웠다. 지금도 일정부분 존경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달라지는 시대에 따른 변화하는 제사 문화, 달라진 여성의 사회적 역할, 가정 내 동등하고 균형 잡힌 부부 관계를 따라가지 못하는(어쩌면 의도적으로 따라가지 않는) 모친의 정체가 안타까웠다.


  우리나라 비비언 고닉과 그녀의 어머니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도 일정 부분 대화가 진행이 되고,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 부럽기도 하였다. 나와 내 모친의 대화는 소통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일방적으로 한숨과 울음이 섞인 한탄을 듣거나 통하지 않을 의견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종종 들었다. 명절과 생일 등 연중 몇 차례의 이벤트를 통해서만 만났던 이전에 비해 가깝게 살게 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모친의 고집스러움을 자주 맞닥뜨리게 되고 더 자주 다투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 모친은 ‘가정 내 입지와 자식들에 대한 통제권을 제사문화 및 남편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과거 유교주의 안에서 찾으려는 여성’의 부정적 이미지로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존경과 안쓰러움의 대상이었던 모친은 가까이에서는 ‘한국 전통 여성상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 같아 때로는 화도 났다.

남편과 자식에 모든 생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삶은 어디에 둔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쌓인 삶의 회한이 딸과의 소통 단절, 한탄이 된 건 아닐지. 시대가 그랬고,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안에서도 깨어나고 조금 더 다른 방향을 모색해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사나운 애착’에서 벗어나 어떻게 독립된 여성으로 설 것인가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2021년이 되어서야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다. 우연히 국내 출간이 늦었던 걸까, 우리나라의 모성에 대한 인식변화가 늦었던 걸까?

비비언 고닉의 회고적 에세이 <사나운 애착>은 내게 ‘사나운 애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지 해결의 작은 문을 열어준 고마운 책이었다. 여성이란 존재가 여성성을 어떻게 다루며 건강한 독립을 꿈꿀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한국 여성 독자들에게도 공감이 되는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독서 내내 고닉의 글쓰기는 진실하고 담담한 자기 고백과 같이 느껴졌다. 자칫 감정적이 되기 쉬운 경험의 글쓰기에 있어서, 등장인물들과의 적정한 거리감을 두고 마치 관계에 개입되지 않은 관찰자의 느낌으로 서술해나간다. 이는 글의 진정성을 의심치 않게 하며, 보다 그녀의 당시 감정을 따라가는데 이질감이 없게 한다. 고닉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억지로 주입시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공감하며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통찰하며 따라오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모친과의 건강한 거리두기를 하기로 했다. 한국 여성의 비극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으며, 이후 여성 세대를 급격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발견한다.

현재 사회적 화두가 된 ‘저출산 문제’, ‘젠더 갈등’ 등은 어쩌면 그 변화의 신호탄이 아닐까 싶다. 변화는 젊은 여성들의 건강하고 굳건한 독립, 자립의 자양분이 되어줄 거라 기대한다. 현재는 ‘문제’와 ‘갈등’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포기하지 않는 소통, 객관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역지사지해보는 과정을 통해 ‘해결’과 ‘해소’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소통이란 무얼까?

나는 모친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관점에서 서로 다른 주체임을 먼저 인식하는 첫걸음부터 하지고 다짐했다. 나 역시 고닉의 고백처럼 오랜 기간 -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도 있고 내 바깥에도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 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젠 달라지고 있는 시대,

새로운 독립의 서사를 써 내려가며, 보다 객관적으로 모친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는 곧 그녀에 대한 이해인 동시에 나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가까운 친구들과 애정 하는 여성 동료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나와 같이 한국에서 ‘독립된 여성으로 살아가기’, 그리고 ‘진짜 내가 원하는 나’를 찾는 길의 첫걸음을 함께 하길 바란다. 주인공이 엄마에게 권했던 작가 조지핀 허브스트의 전기를 읽은 후,


   “그 여자는 행동했고 해냈어, 그치?” “그 여자가 자기 삶을 살았다는 게 부러워, 나는 못 그랬다.”


하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을 수 있는 나와 우리의 수많은 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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