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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늦깎이 미술인

by Xero Mar 11. 2025

공사장 일을 마치고 두터운 작업용 안전화를 끌며 지하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필 지하철 맞은편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척 재빨리 얼굴을 피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내 앞으로와 말을 걸었다. 

"어? 너 제로(가명) 아니야? 여기서 다 만나네!"

멋지게 옷을 빼입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다. 먼지 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벼운 대화가 오고 가다, 어설프게 말을 얼버무리고 때마침 지하철 문이 열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내 모습이 궁금해 집에서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안전모에 떡진 머리, 먼지와 흙이 범벅된 얼굴, 페인트 자국과 찢어진 작업복, 최악이었다. 씻고 나와 와인 반 병을 들이켰다. 우스운 꼴에 고급 와인을 마시니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지금쯤 거지새끼라고 내 소문을 내고 있겠지?"

안 그래도 작업장에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미운털이 박혀있던 참에 홀린 듯 반장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이 생겨서 일을 못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까짓꺼 나도 사무직 하면 될 거 아냐.."


내 나이 서른 초반, 누군가는 어리다고, 누군가는 많다고 하는 나이이다. 하지만 20대 때와 달리 30이라는 분기점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해 보니 어느새 친구들 간의 격차는 매우 커져있었다. 젊은 CEO가 되어 호화로운 삶을 사는 친구도 있고 결혼을 하고 애가 유치원인 친구도 있다. 반면 나는 딱히 좋은 경력도, 스펙도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놈이다. 소위말하는 노가다꾼.

트레이너, 스포츠마사지사를 하다가 최근에는 페인트, 상하차, 잡부 등 완전히 몸 쓰는 일쪽에 기웃거렸고 그마저도 하나 배워갈 때쯤 때려치우고 옮겨 다니기를 반복해 왔다. 


일단 저질러 버렸으니 노트북을 켜고 구인 사이트를 접속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게임 원화가'. 높은 연봉에 스펙도 필요 없고 오로지 그림만 가져오라는 조건이었다. 좋아했던 운동은 접은 지 오래였고, 내 취미라곤 딱 2개, 게임과 그림 그리기 뿐이었다. 그림은 배워본 적 없이 혼자 책을 보며 게임이 질릴 때쯤 한 번씩 소묘를 했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신입으로 들어가기 무척 애매한 나이긴 했지만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선택지였다.


나는 이곳저곳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일단 먼저 부딪혀보는 습관이 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이 습관이 무조건 나쁜 점만 있진 않았다. 예체능 학원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2년 정도 학원은 다닐 수 있는 자금은 있었다. 내일이면 의지가 식을 나를 잘 알기에, 그나마 큰 학원에 예약을 미리 눌러놓고 마음에 별로 안 들어도 일단 등록하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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