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들 이야기 31
제주, 늘 다시 가고 싶은 곳, 이국적이고 신비함이 있는 곳, 산뜻함과 청량함이 있는 곳이다. 무려 10년만의 방문이다. 언제든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번 제주 방문을 내심 기다렸고 기대부터 잔뜩 부풀어 올랐다. 이번 방문은 일에서 벗어나 배움의 신분으로 세미나에 참석하는 일정이지만 학술 공부와 준비보다는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들뜬 마음이 먼저 생기니 확실히 학생 모드가 된 듯했다.
그리고 뒤늦은 교정 생활의 첫 방학을 맞았지만, 방학 중의 세미나는 필수 과정이라 역시 대학원 학업은 만만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장소가 제주이다 보니 학업에 대한 부담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출발 일주일 전에 받아 든 전체 일정표와 세미나 자료는 예상을 뒤엎었다.
3박 4일 동안 쉴 수 있는 자유시간은 일과 후의 저녁시간과 토요일 오 전시 간 뿐이었다. 도착한 첫날 오후부터 수업을 했고, 다음날은 하루종일, 토요일은 오후에, 떠나는 일요일에는 오전에 수업을 했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은 서울 교정 수업의 연장인 듯했다.
그런데 왜? 제주까지 왔을까? 박사과정을 쉽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방학 중에 하는 세미나 형식의 과정을 이렇게 타이트하게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제주를 만끽하기보다는 학업 쪽으로 마음을 돌려세워야 했다.
수업내용 중 한 과목은 양적방법론! 30년 전 대학시절 무척 어렵게 공부한 것인데 여기서 다시 만났다. 굳이 제주도까지 와서 통계세미나를 하는 이유가 있을 듯한 데다가 논문을 쓸 때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내용이고 세미나 마지막 시간에 시험까지 본다고 하니, 게다가 몇 학기를 배워도 알기 어려운 이 분야를 단 2일 만에 커버해야 하는 부담감까지, 여하튼 나는 모든 집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사실 대학시절 배웠지만 그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혹 아직도 나의 천재성이 남아있을까 하는 기대조차 자만으로 들통나버리는 바람에 내 속에선 헛웃음만 나왔다. 여하튼 무거운 통계용어들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잡아먹어버린 듯 내 마음엔 점점 그늘이 드리워졌고 제주와의 인연이 왜 이리 야무지게 꼬이는지 살짝 원망도 되었다.
그러나, 원망은 젊은 인재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상위 수준의 시험 성적을 받아 들자 곧 반전이 되었고, 제주 세미나에 동기화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기초 과목이지만 과거와는 다른 느낌에 대해 정리를 해보았다.
대학시절에는 그렇게 어려웠던 과목이었는데 왜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쉽게 이해가 되고 흥미도 생길까? 교수의 강의 실력 때문일까? 나이가 들면서 향상된 이해력 때문일까? 회사 실무에서 사용하지 않았어도 경험, 구력 때문일까? 여러 질문들을 해봐도 뚜렷한 답은 아닌 듯했다.
역시 핵심은 마음가짐이었다. 대학시절과 지금 유독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음가짐이 유일할 것이다. 그때는 수강해야 할 과목의 하나로, 대학생의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면, 이번에는 늦깎이 도전의 일부분으로 과정에 대한 진중함이 있고 초집중해야겠다는 스스로의 마음 가짐이 있었다. 늦게 시작한 도전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저변에 깔려 있었고, 제주 세미나도 들뜬 흥분이 있었지만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내 안의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넉넉함과 여유로움도 젊음의 그 어느 때 보다 컸다. 분명 삶에 대한 나의 자세와 생각은 더 단단히 다져지고 있고, 이 결과가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다.
120세 시대에 반 바퀴를 돌아가는 지금의 도전이 더 무게가 무겁고 의미가 깊다. 인생의 경륜, 경험이 쌓여서 하는 도전의 결과는 증폭이 되는 듯하고, 그 가치는 젊음의 그때보다 비교를 못할 듯하다. 생동감이 느껴지고 흥분된다. 에너지가 느껴지고 끌어당김이 생긴다. 생각하는 것, 뜻하는 것, 그려보는 것들이 이루어질 듯하다. 늦깎이 도전들이 이끄는 대로 나를 던져 다가오는 시간들을 채워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