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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Dec 20. 2024

송년, 여직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송년의 날, 이른 오후가 되면 사무실의 모든 여직원들이 사라진다. 그리곤 몇 시간 뒤에 낯설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행사장으로 들어서는데 마치 영화제에 등장하는 셀럽들의 모습이다. 포토존에 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펼쳐내는 이들의 표정에는 해맑은 웃음과 수줍음이 섞여 있고 즐거움과 흥분도 묻어 있다. 행사장 안으로 옮겨 딛는 발걸음에서도 오늘을 즐길 것이라는 당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이며, 이 날에 무슨 일이 있는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캐럴송, 구세군의 자선냄비, 군밤과 군고구마 장수들, 벙어리장갑 끼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아이들 모습... 매해 연말이면 이런 낭만적인 모습들이 떠오르고 그립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고 기술이 빠르게 변해서인지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시내모습이 조금 낯설기도 하다. 이젠 기억에서도 점점 사라져 간다. 


과거 연말의 길거리 추억과는 다르게 잊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연말이 되면 여지없이 기억단지에서 슬그머니 나와 연말 분위기를 한껏 잡아주는 그 장면들의 기억이다. 오랜 회사 생활의 흔적이 깊어서 그런 것일까, 회사를 떠나 퇴임을 했음에도 이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는다. 어쩌면 지우고 싶지 않아서, 어쩌면 더 생각이 나기 때문에 기억 단지에서 새지 나가지 않게 꾹꾹 눌러서 보관하기 때문일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 유럽, 터키, 러시아에서 대표로 있는 동안 연말이면 전 직원들과 도우미 분들과 함께 했던 송년회 밤이다.


유럽의 문화, 중동의 터키 문화, 그리고 러시아 문화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연말의 하루, 송년의 밤에서 한해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동료들과 즐겁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다. 늘 사연이 많은 한 해였음에 노고와 성취를 치하하고, 힘들었음에 위로하고, 좋은 일에 축하하고, 배려와 베풂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눈다. 일 년이라는 긴 시간 중에 단 하루의 밤이지만, 시간의 문이 열려 모두가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가 되는 각별한 순간들이 된다.  




실로 일 년의 기간 동안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는 좋은, 때로는 나쁜, 때로는 힘든, 때로는 신난 일들이 일어난다. 그 여정에서 같이 웃고, 울고, 위로하고, 다투면서 동료애와 애증이 생기고, 신뢰와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생긴다. 이 모든 감정과 공감대는 연말 송년의 밤에서 절정을 이루고 모두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해진다. 모두의 눈빛에는 이 순간의 행복하고 평온한 감정이 지속되길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하다. 송년의 밤에 보이는 이들의 눈빛과 표정에는 사업이 어려울 때 어떤 노력과 희생으로 극복했는지, 테러와 쿠데타, 전쟁의 위기에서 어떻게 감정을 추스르고 중심을 잡았는지에 대한 모든 기억이 희열로, 간절함으로 담겨 있다.  모습들과 감정이 잔상으로 각인된 듯 남아 있기 때문에 연말 송년의 밤이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연말 송년의 밤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이유라고 할까.. 송년의 밤 행사 당일 아침부터 사무실은 들뜬 분위기로 가득하다. 탕비실, 휴게실, 회의실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웃음과 이야기 꽃을 피운다. 사실 행사 며칠 전부터 아침 시간이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행사 당일에 이야기 꽃은 절정에 이르러 활짝 피게 된다. 


이른 오후가 되면 모든 여성 동료들이 갑자기 사무실에서 사라진다. 이 날이 여성 동료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라진 몇 시간 동안, 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미용실에서 새 신부처럼 화장하고 머리를 다듬고, 의상실에서는 준비한 드레스로 단장을 한다. 일에 파묻혀 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성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행사장에 입장하는 이들의 모습은 무덤덤한 마음을 녹여버리고, 미적지근한 심장 박동을 거칠게 하고, 밋밋한 표정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큰 변신에 얼굴을 못 알아보기도 하지만, 이날은 동료들의 숨어 있던 아름다움이 충분히 빛을 발하게 한다. 송년의 밤 행사가 만들어내는 가치로운 역할이다.  




아무리 사업이 어려워도 연말 송년의 밤 행사는 꼭 했다. 동료들의 마음과 이들이 '송년의 밤'에 부여하는 의미를 알기에, 이들이 이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이 행사를 했다. '송년의 밤'을 앞둔 며칠, 당일 날 아침과 오후에 일어나는 일들과 사무실에 만들어지는 에너지와 기운은 내년을 힘차게 시작하게 하는 동력이 됨을 알기에 이 행사를 했다. 


내게 '송년의 밤' 의미는 남다르다. 계획된 행사, 일과성 행사, 형식적 행사, 즐기는 행사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년의 밤'은 동료들의 감정을 존중하고, 동료들이 스스로를 존중하게 하고, 더 뛸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고, 동료애(Colleagueship) 공고히 하는 공감대를 키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년의 밤'은 내게 치매가 오지 않는 한, 나의 추억과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한 값진 기억으로 각인될 듯하다.  



송년의 밤은 내가 지나온 여정에서 그 해의 마무리를 짓는 자리였다. 사업에서 어느 한해 편하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_국가부도, 테러, 지진, 쿠데타, 전쟁_로 인해 사업은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졌고 그때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었다. 동료들의 헌신, 희생, 인내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돌릴 수 있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값진 성과를 만들 수 있었다. 어려움을 지나갈 때 옥석이 드러났고 같이 하게 된 동료들과는 신뢰가 굳어졌다. 


같이 가는 동료들과 일 년에 하루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마음으로 토닥거리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맘껏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 동료들, 정말 멋지고 아름답다"라고. 송년의 밤이 내겐 그런 자리였다. 올핸 내가 갈 송년의 밤이 없지만, 내 마음은 오랜 시간 같이 했던 동료들과의 송년의 밤 추억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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