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노아 Feb 18. 2024

부담,긴장,상쾌,허탈,안심,
사업가만의 하루

하루에 단 1편밖에 없는 비행기를 놓치고서 고개 들어 바라보는 심정을 아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탈보다 안심되는 경험을 가져 봤는가?


2018년 4월, 미국 LA에서의 하루가 내겐 그러한 하루였다!

부담이 긴장이 되고, 긴장이 상쾌로, 상쾌는 허탈로 이어졌지만 이내 안심이 되었던, 

아주 기억에 선명한 그날.


미국 LA 소재 거래선 미팅을 위해 4명이 팀을 꾸렸다. 이번 방문은 공급하는 제품의 가격을 인상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와 지난 1분기 실적을 리뷰하는 Quarterly Business Review(이하 QBR) 미팅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거래선과 분기 단위로 지난 분기 실적 및 차 분기, 차차 분기 판매 목표를 정하고 세부 action item을 설정하는 미팅을 QBR이라고 한다. 시장의 상황이 크게 요동치지 않는 한, 이 QBR미팅에서 공급하는 제품 가격의 적정변동폭을 협상하여 정하기도 한다.


매 분기별 진행하는 미팅임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힘든 과제가 가격 협상이다. 가격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공급자는 가능한 적게 내리도록 막아야 하고, 구매자는 큰 폭의 가격 인하를 위해 공격적으로 덤벼든다. 반대의 경우, 공급가를 인상해야 하는 경우는 드물게 발생하는데, 공급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세밀한 전략을 수립하여 최소 3가지 이상의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협상에 임한다. 


이번 QBR 미팅은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미팅이었다. 당시 모든 원자재 가격상승과 제품공급부족으로 인해 시장이 요동치는 상황이었기에 모처럼 공급자 시장(주 1)이 형성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분기 실적 리뷰와 가격 미팅을 분리해서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거래선 입장에서는 실적과 가격을 같이 협의할 때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물타기를 할 수 있기에 분리해서 미팅하는 것을 항상 달가워하지 않았다. 실적이나 가격 중에 하나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게 있으면 그것을 활용하여 다른 과제를 유리하게 끌고 가는 형태였다. 그러나, 우리는 공급자 시장 상황임을 부각해 가격 미팅을 별도로 해야 함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참고로 공급자시장 상황에서는 가격 인상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 만약 가격 인상을 못하게 되면 사업에는 직접적인 타격들을 받게 되기에 거래관계의 리스크를 지고 서라도 가격 인상을 해야 한다.


가격 인상을 못하게 되었을 때 받는 타격들은 이러하다. 우선, 시장에서 호구가 된다.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구매자 눈치를 보는 회사, 가격의 주도권도 못 가져가는 회사, 만만한 회사 등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자연히 모든 협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몰린다. 둘째 타격은 재무적 손실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 원자재 공급 부족으로 완제품을 만들어 팔면 팔수록 손실이 생긴다. 셋째, 호구, 여린 회사의 이미지는 시장에서 신뢰를 잃어 거래 혹은 거래 관계가 약해지거나 중단된다. 


시장은 냉정하다

약한 자에게는 철저히 군림하고

강한 자에게는 무조건 복종한다.

인간이 만든 사회, 거래와 협상을 비롯한 사업에서 벌어지는 시장상황은 양해와 양보가 없이 냉정하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실적 리뷰 미팅은 오전 11시 30분경, 우리에게 유리하게 마친 후, 가격 협상을 위해 별도의 미팅 룸으로 이동을 하였다. 오늘의 미팅을 위해 1주일을 준비했다. 거래선이 취해올 상황들을 예측한 시나리오를 10여 개 상정하고 각각에 대한 상황 설정과 역할극까지 하면서 준비했다. 이처럼 가격 협상은 준비 기간에도 긴장도를 높이는 중요한 과제이다.


가격협상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는 가장 먼저 긴장부터 세팅된다.

그런데 이 긴장을 어떻게 빨리 해결하느냐에 따라 테이블세팅비는 수십, 수백만불의 값을 펼쳐낼 판으로 변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경우, 협상 테이블의 규모가 더 크기에 가격 협상단의 준비, 특히 가격 인상 및 인하의 로직 준비는 아주 세밀해야 한다. 


가격 협상에서 밀려 불리한 결과로 이어지면 책임자는 그 부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연유로 가격 협상 테이블에서도 현장에서 결정 못하고 본사와 상의하면서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모습에는 장단점이 있지만, 충분한 준비와 현장 분위기의 감각적인 판단으로 책임감 있는 결정을 현장에서 해야 하고 본사도 그 결정을 존중하는 풍토가 형성된 기업이 더 강한 기업으로 성장한다.   


분명 우리에게 유리하게 마친 오전 미팅이었으나 1시간이 지나도 거래선의 협상단이 나타나지 않았고 점심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예의인 샌드위치 정도의 다과도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거래선은 우리가 가격인상을 통보할 것을 알고 우리와 기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소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 예측 시나리오에서 충분히 감안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나리오대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며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으로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업가가 된다는 것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거나 최민식, 송강호 못지않은 배우로서의 능력도 겸비해야 한다. 영화에서 종종 보듯이 '협상(協商)'이라는 것은 표정관리부터 디테일한 손끝의 동작까지 아주 미세하게 상대에게 들통난다. 조급하거나 불안한 표정을 들키는 순간, 협상은 우리에게 불리한 게임으로 진행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유능한 협상가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 채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심안(心眼)을 소유하고 교섭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약 2시간 30분이 경과해서야 거래선 협상단 3명이 나타났다. 구매 총책 프랭크(Frank), 어커운터 매니저 쥴리(Julie), 실무자 패트릭(Patrik)이었다. 이들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터라, 우리는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한 채 한편으로는 진진한 태도로 협상에 임했다. 예상대로 프랭크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서 가격 (안)을 제시하라고 했다. 거친 말투였고 불편함이 역력하게 보였다. 다음 역할은 아마도 쥴리가 협상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쥴리는 거래선 내에서도 깐깐하기로 악명 높은 매니저였다.  




나는 당초 준비한 시나리오 중에 최고 인상률 가격을 먼저 제시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5~8% 가격 인상이었다. 협상단 책임자로서 순간적인 판단을 했다. 미팅룸에 2시간 30분 고의적으로 늦게 나타난 이유는 이들도 충분한 가격 인상을 예상하고 있음이었다고 판단했다. 내가 이들의 예상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할 경우, 그 순간 호구가 되어 가격 인상 주도권을 뺏기게 되는 상황으로 판단했다. 


사업은 '목표'와 친해져야 한다. 목표 없는 사업은 있을 수 없고 목표는 항상 150% 정도의 기준으로 책정된다. 해낼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 마지노선은 5~8%의 인상이었지만 25%의 인상률을 나는 먼저 제시했다! 


“프랭크, 다음 두 분기 가격은 지금 대비 25% 인상한다. 대신, 공급 부족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최소 2개 분기 동안은 가격 인상 없이, 동결하겠다”     


일단은 성공이다! 2시간 30분이나 고의적으로 늦게 나타난 이유는 가격인상에 대한 방어책의 하나로서 기싸움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작전(?)에 말려 예상보다 적은 인상률을 제시했을 경우, 오히려 우리가 호구가 되기 십상이었다. 25%라는 파격적인 가격인상 제시에 프랭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쥴리의 표정에는 난감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아주 잠시 수상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더니 플랭크는 화가 나서 나가버렸고 쥴리, 패트릭도 따라서 나갔기에 첫 협상미팅은 5분도 안되어 끝이 나버렸다. 옆의 직원들은 이들의 뒷모습에 약간 상기된 것도 같았지만 숱한 경험을 지닌 나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오히려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거친 반응은 포기나 항복을 의미한다.

저항하지 못하기에 과격한 행동이 나오는 것이며

대화할 수 없기에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협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 사업하는 이가 아니라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승리의 쾌감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기된 직원가운데 협상단의 태도에 살짝 겁을 먹은 태우가 “가격을 너무 세게 부른 걸까요? 협상이 결렬되면 어쩌지요?”한다.

“기다려 보시게. 카운터협상안을 들고 들어올 테니”

나는 자신 있게 동료를 안심시켰다.


사업가에게 자신감은 진정한 무기다. 사업은 거래로 이뤄지고 거래는 상대와의 협상으로 성사되며 협상은 내 것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포기시키는 것이다. 짧은 길든 이 자리에서 눈빛부터 온몸에서 발사되는 자신감은 필수다.


이들이 나가고 1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점점 굳어지는 동료들의 표정과는 달리 나의 마음에선 이겼다! 는 쾌재까지 들리는 듯 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결국, 문을 박차고 나간 1시간 30분 뒤, 씩씩거리며 프랭크가 들어오고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게임은 끝났다. 사업에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한 것과 진배없다. 여기서 이겼다는 확신을 지닌 나는 오히려 더 여유 있게 상대를 위로하는 위치로 바뀌게 되고 상대는 조르기, 아니면 우기기, 아니면 근거 없는 주장하기, 심지어 협박(?)하기 등 다양한 기술을 선보인다.


단지 한 가지 말은 마음에 걸렸다. 공급 과잉이 왔을 때 가격 인하는 각오하라는 말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선은 잡았다고 확신을 했다. 


한참의 넋두리를 쏟아 낸 뒤에 프랭크는 자기의 가격과 조건을 제시했다.


“다니엘, 20% 인상까지 수용하겠다. 향후 2개 분기 가격은 동결이다. 그리고 공급 물량은 확보해줘야 한다.”


프랭크가 제시한 가격은 의외의 수준이었다. 비록 내가 제시한 25%보다는 낮으나, 목표한 가격 (5~8%)보다는 10% 이상 높은 수준이었기에 내심 당황했다. 예상한 프랭크의 제시 가격은 최고 10% 수준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주기 위해 잠시의 시간을 소비한 후, 프랭크의 제안을 수용하고 공급은 보장해 주기로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온 이들과의 가격 협상 중에서 이번이 최대의 쾌거였다. 같이 온 후배 동료들의 긴장된 표정은 풀어졌고 프랭크와는 찐한 악수와 저녁 식사를 약속하고 미팅을 마무리하였다. 


나는 여기서 거래선의 굵직한 시야와 담대한 의사결정을 경험했다. 공급부족은 생각보다 심각해지는 상황이었기에 이들은 가격을 더 인하하는 것보다 물량 확보를 먼저 선택한 것이다. 거래선 회사가 글로벌로 크게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실지로 그 후 약 3분기 동안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보다 물량 확보가 더 어려웠고 우리는 먼저 큰 폭의 가격 인상을 승인한 프랭크에게 공급을 안정적으로 제공했다.


사업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특히 가격 협상에서는 기선, 주도권 확보가 되어야 한다. 을의 위치에서도 주도권을 놓치면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한다. 협상은 사람 간의 기싸움과 같다. 준비 없는 기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논리로 준비한 뒤 펼치는 기싸움은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작용하는 본인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열린 감각에 들어오는 느낌, 그 느낌이 가는 대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가격 협상이 좋은 예다. 장세를 읽으면서 준비한 시나리오와 찰나의 판단으로 결정한 가격(안)이 상대방의 인식을 자극한 것이다. 상대방 또한 예상치 못한 수준의 가격 인상으로 공급 부족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고 장세 판단과 열린 감각으로 결정을 한 것이다. 결국 거래선과 나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다. 거대한 시선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어야 하고 열린 감각으로 찰나의 판단을 선택한 윈윈(win-win)이었다.


이날 쾌거를 거둔 뒤, 가격협상 자체의 부담과 그간의 준비에 쏟았던 긴장과 열정, 협상에서의 초조함을 뒤로하고 만족스러운 결과에 모두가 상쾌한 남은 하루를 보냈다. 이때의 상쾌한 기분은 그 이후의 회사 생활에서 다시 느껴 보지 못했다. 




다음날 이른 오후에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13시 50분 출발하는 비행기라 아침 식사 후에도 시간이 많았다. 전날 승리의 기운은 하루가 지나도 여전히 나를 흥분시켰다!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시장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귀국 일정을 막내동료에게 맡기고 아무 생각 없이 막내를 따라다녔다. 시간이 충분히 남는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세밀하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 로컬 식당에서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공항으로 향했다. 

협상에서 이긴 승리의 기분으로 편하고 여유로운 시장조사까지 마쳤는데 아뿔싸, 역시 손해 없는 이득은 없고 대가 없는 보상도, 계산 없는 영수증도 없다. 우리는 공항에서 미처 치르지 못한 계산을 치러야 했다. LA에서 귀국하는 단 1편의 국적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고개 들면 보이는 저 날아가는 비행기에 우리는 탔어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승전보 뒤에 이 정도 실수는 해주는 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답지 않은가! 


막내 동료 덕택에 시장 조사는 더 할 수 있었고 하루를 더 체류하게 되어 동료 간에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사건은 매년 반복되어 회자되었다. 부담-긴장-상쾌-허탈-안심의 감정을 담은 사례로.. 나는 아직도 막내 동료에게 즐거운 사례로 얘기하고 있다. 후배 동료 덕택에 하루 동안에 여러 가지 감정이 큰 진폭으로 교차하는 것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주 1) 공급자 시장 : 시장의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할 때 일어나는 상황으로 공급자가 가격 협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반대의 경우, 구매자 시장은 공급이 수요 보다 과잉일때 일어나는 상황으로 구매자가 가격 협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쿠키 얘기]

당일 첫번째 기싸움 미팅이 5분만에 끝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평소 평정심을 잃지 않던 프랭크가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25% 가격인상 서류를 집어서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잠시이지만 미팅룸에는 최고조의 긴장이 조성되었고 그 순간에 누구도 말을 꺼낼 판이 아니었다. 서류를 허공에 던지는 프랭크의 액션은 사전에 준비 안된 즉흥적인 것이었고 그 순간의 긴장을 말을 함으로써 깨기 보다는 이어지는 다음 액션인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그 장면 또한 즐기고 있었다.


프랭크의 초대로 저녁 식사는 동네 맛집 식당에서 가졌다. 낮 시간의 긴장되었던 모습은 1도 없었고 아주 즐거운 식사를 했다. 프랭크는 가격 인상에 동의했지만 향후 공급 상황이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예상을 얘기했고 본인도 만족스러운 미팅이었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 공식 미팅의 '긴장'과 석식의 '편안한 즐거움'을 구분하는 깔끔한 성격과 프로의 자세는 프랭크가 가진 장점이었다.    

     

이전 10화 갈등을 피할 것인가?,  해결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