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인도를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혼자 여행 중이었고, 숙소에서 공항까지 가야 했다. 약 30분 거리.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고 “에어포트, 하우 머치?” 하고 물었다. 기사 아저씨는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십 달러"라 말했다. 대략 거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벽 시간대였고 대안도 마땅치 않아 적당히 15달러에 흥정을 해서 탔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기사의 말이 바뀌었다. '이십 달러'를 달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이나. 우리는 15달러에 흥정을 했다. 난 더 이상 못준다.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노 이십 달러'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그냥 15달러만 내고 갈까 싶었지만 낯선 외국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20달러를 주고 내렸다.
예전에는 여행할 때 택시를 타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특히 여행 첫날 공항에서 시내로 갈 때, 도시가 작아서 프리페이드(Pre-payed) 택시가 없는 경우 첫날부터 기분을 망칠 수도 있었다. 언어도 잘 안 통하고, 처음부터 50% 깎고 들어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누군가가 흥정을 잘해야 하고, 바가지요금을 피하기 위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특히 현지 사정을 모르는 초행자는 덤터기 쓰기 딱 좋았다. 오죽했으면 가이드북에는 '바가지요금을 피하는 방법' 혹은 '흥정을 잘하는 법' 이란 게 있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마이택시(MyTeksi)’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불과 몇 년 만에 동남아 전역으로 퍼졌다. 지금은 태국, 베트남, 라오스에서는 물론이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나라별로 ‘로카’, ‘인드라이브’, ‘패스앱’, ‘고젝’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통칭해 그냥 “그랩”이라 부른다.
그랩은 우리가 스마트폰 없이 여행하던 시절과 스마트폰 이후의 여행을 나누듯, 명확하게 경계가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구글 맵이 여행의 지도를 바꿔놓았듯이, 그랩은 여행자의 이동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랩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예측 가능성’과 ‘투명함이었다. 요금은 미리 앱에서 확인 가능하고, 기사 정보와 차량 번호도 기록된다. 심지어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더 이상 현금 때문에 환전을 서두를 필요도, 거스름돈을 못 받아 짜증 낼 일도 없다. 무엇보다 현지 언어를 몰라도 목적지만 입력하면 이동이 가능하다. 짧은 영어로 현지 드라이버와 다툴 염려가 없어졌다.
이제 호텔 프런트에 물어보며 요금을 예측하고, 덤터기를 걱정하며 출발 전부터 스트레스받던 여행은 사라졌다. 그랩은 단지 교통수단을 넘어서, 여행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유를 확장시킨 도구다. 물론 아직 그랩이 진출하지 않은 지역도 있다. 작은 도시나 일부 공항에서는 여전히 ‘노 그랩(No Grab)’이라는 팻말이 보이기도 한다. 기존 택시 기사들의 생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리나 프놈펜 같은 도시에서는 공항 진입이 제한되거나, 현지 택시 조합과의 갈등이 아직 남아 있다. 프놈펜에서 그랩을 타려면 공항에서 5분 정도 걸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캄보디아의 한 택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어. 예전엔 면허 따고 하루 종일 줄 서서 손님을 기다렸는데,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운전기사가 될 수 있잖아.” 이 말은 불만이자 동시에 현실 인식이었다. 그랩은 기존 택시 기사들의 일자리를 위협했을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경우 기존 운전기사들의 반발이 심해서 결국 그랩과 같은 플랫폼이 자리잡지 못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누군가의 밥벌이를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부수입을 얻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었다.
기술의 혁신은 ‘소득을 올릴 자격’을 가진 사람의 범위를 넓혀 왔다. 예전에는 택시 면허를 사거나 조직에 가입해야만 운전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지금은 자기 차와 스마트폰, 그리고 약간의 서비스 정신만 있어도 부수입을 만들 수 있다. 전문 라이선스가 요구되던 영역이 점차 ‘누구나 참여 가능한 시장’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교통에서 일어난 변화는 교육·금융 등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 덕에 교단에 서 본 적 없는 일반인도 적은 비용으로 유튜브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 최첨단 기술로 아주 적은 수수료만으로도 국제 송금을 할 수 있다. 기술은 편의를 높이는 동시에, 기회의 문턱을 낮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 집단의 반대가 있지만, 결국 사용자는 더 나은 선택지를 얻고, 시장은 더 다양한 목소리를 품게 된다. 이제는 누구에게 돈 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랩은 단순한 앱을 넘어, 동남아 거리 풍경을 질서 있게 만든 혁명이다. 우리는 이 앱 덕택에 여행이 훨씬 쉬워졌고 즐거워졌다. 바가지 없는 요금,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운전, 언어가 달라도 소통 가능한 도시. 이것이 그랩이 만들어낸 새로운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