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쌀국수를 처음 먹어봤던 때는 2013년쯤이다. 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동남아에 발을 디뎠다. 왕궁을 구경하고 나서 점심을 먹으려고 한 로컬 식당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구글 번역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대충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윽고 주문한 쌀국수가 나왔고 배가 고파서 한 젓가락 집었다. 그런데 먹으면서 이상한 맛을 느꼈다. '샴푸' 맛이 느껴졌다. 그렇다. 그때 고수를 처음 먹어본 것이다. 나는 샴푸맛이 나는 이 정체 모를 식물을 빼고 먹었다. 지금이야 고수를 아주 좋아하지만 처음 먹었던 그때에는 그 맛이 이상했다. 굳이 비유한다면 서양인이 깻잎을 먹는 느낌?
한국인들에게 쌀국수 하면 대부분 베트남을 떠올린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쌀국수 전문점이 '퍼(Pho)'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식 쌀국수를 팔고 있고, 그래서 '퍼'는 어느새 쌀국수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데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다른 나라들도 모두 비슷한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대륙이기 때문에 당연히 쌀국수도 발전해 있다. 베트남, 태국, 라오스는 물론이고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도 나름의 쌀국수가 있다. 다만 같은 쌀로 만들지만, 국물 맛도 다르고 향신료도 다르고 먹는 방식도 다르다.
베트남: ‘퍼’를 중심으로 한 맑은 국물 쌀국수
태국: '꾸어이띠야우'이며 대체적으로 국물이 적고 맛이 진함. 똠얌 같은 향신료 국물도 흔함.
라오스: '카오 삐약'이라고 하며 맑은 국물 베이스. 고추기름을 넣으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매우면서도 얼큰한 맛
캄보디아: ‘꾸이 띠우’라는 베트남과 비슷한 맑은 국물
미얀마: '몽힌가'는 어묵과 생선 국물에 쌀국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국수보다 ‘나시(쌀밥)’ 문화가 강하지만 ‘락사’ 같은 쌀국수도 존재
한국에서 흔히 먹는 쌀국수는 대부분 베트남식이다. 가장 전형적인 쌀국수이다. 맑은 소고기 육수, 깔끔한 향신료, 숙주와 바질, 라임을 곁들여 먹는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고수도 넣어야 제맛이 난다. 베트남에서 먹는 퍼는 한국에서 파는 것과 비슷하다. 그만큼 한국인의 입맛과 잘 맞는다. 담백한 맛으로 국물이 시원하다. 현지인들은 국물은 먹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국물을 좋아한다.
태국 하면 대표적인 음식이 세계 3대 수프에 속한다고 하는 '똠양꿍'이다. 한국의 오미자처럼 매운맛, 신맛, 단맛, 짠맛 등등 모든 맛을 즐길 수 있다. 태국 쌀국수도 똠양꿍처럼 다양한 맛이 있다. 태국 쌀국수는 한마디로 말해 ‘진하다’. 때론 닭발과 선지가 들어가며 어묵과 피쉬볼까지 들어간다. 향신료도 강하고 단맛도 강하다. 베트남 쌀국수에 비해 입안에서 훨씬 더 많은 게 복잡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좀 낯설 수 있는데, 한두 번 먹다 보면 은근 중독된다. 복잡한 맛이다. 딱 ‘태국’스러운 맛이다.
라오스 음식은 태국과 대체적으로 비슷하나 쌀국수는 좀 다르다. 쌀국수는 베트남과 닮았다. 진한 국물의 태국과 달리 베트남의 영향을 더 받아서 맑은 국물이다. 맑은 국물에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들어가고, 기본 베이스는 담백하다. 라오스의 가장 큰 특징은 '고추기름'에 있다. 이걸 커피스푼으로 적당량 넣으면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얼큰하면서 담백한 국물에 매운맛이 살아있는 국물'로 변신하게 된다. 소주 안주로 먹어도 될 듯한 맛이다.
쌀국수의 기원이 꼭 어느 한 나라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중국 남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의 쌀국수 문화가 동남아로 흘러들어 각국의 기후와 입맛에 맞게 진화한 것이다. 각 지역에서 먹던 음식이 세계로 퍼진 것은 베트남의 역할이 컸다. 정설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먹고 남긴 소뼈와 고기 자투리를 활용해 국물을 우려낸 것이 쌀국수 국물의 시작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프랑스와 미국 등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퍼'를 만들어 팔았고 이게 다시 다른 나라로 퍼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쌀국수가 된 편이다.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쌀국수도 대부분 화교나 베트남 이주민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고, 각 나라의 고유한 재료와 조리법이 더해져 지금처럼 다양해졌다.
동남아의 쌀국수에는 공통된 풍경이 있다. 국수가 주방에서 나올 때는 그릇에 담긴 하나의 형태로 나오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각종 양념들이 그 맛을 완성시킨다. 식당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설탕, 라임즙, 피시소스, 식초 등은 대부분 구비되어 있다. 어떤 곳은 바질, 고춧가루, 숙주나물까지 있다. 먹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나라마다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음식이 다르듯, 동남아도 지역과 문화, 기후에 따라 쌀국수의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더운 나라일수록 향신료 사용이 많고, 강하고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은 같은 쌀문화권이지만 쌀국수가 없었다. 동남아는 연중 따듯하고 물이 풍부하여 쌀이 재배가 쉬웠으나, 한국과 일본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이 길었다. 상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풍부하지가 않았다. 대신 밀이나 메밀 같은 것을 재배하기에도 어느 정도 적합했다. 그래서 한국은 칼국수, 냉면 같은 면 요리가 발달하고 일본은 가락국수, 소바 등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이후에는 라면이나 라멘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는 '쌀로 만든 국수'는 가끔 베트남 음식점에서나 먹는 것이 되었다.
쌀국수는 같은 재료로도 이렇게 다른 맛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쌀국수는 다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문화가 녹아 있다. 국물을 진하게 끓일지, 맑게 만들지, 고수를 넣을지 뺄지, 라임을 짜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각 나라의 음식 철학과 삶의 방식을 느끼게 된다. 같은 재료, 다른 국물. 그것은 마치 같은 삶의 재료를 가지고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라오스 북부의 한 시골 마을. 버스를 타고 도착한 낯선 동네에서 허름한 식당 하나에 들어선다. 흘끗 주방을 보면 뽀얗게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서 쌀국수 면이 익혀지고, 고기 몇 점과 향신료를 담은 국물이 그 위로 부어진다. 부엌 뒤에서는 어린아이가 슬리퍼를 끌며 가게 안을 오가고, 낡은 선풍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가격은 한국돈으로 약 1,800원.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박한 한 끼가 마음의 허기도 채워준다.
쌀국수는 저렴하고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간편한 음식이다. 각자 좋아하는 대로 양념을 넣어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사실 나라마다 쌀국수 맛과 스타일이 다르다. 맑고 깔끔한 베트남, 진하고 복합적인 태국, 담백하지만 매콤한 라오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풀어낸 국물 맛이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쌀국수를 좋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