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이 일상이 되면 과연 삶이 재미있을까?

여행이 일상이 된다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평생 여행만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행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다. 돈이 떨어지면 단순 노동으로 잠시 생활비를 마련하고, 그 돈으로 다시 훌쩍 떠나는 인생. 비행기 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 일정도, 계획도, 구속도 없는 삶. 직장 생활을 하고 나서부터는 로또를 사면서 은근히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여행 작가라는 직업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특히 회사에 가서 제출해야 할 보고서가 많거나, 미룬 업무가 있을 때 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카페인으로 아직 졸린 잠을 깨우면서 키보드 앞에서 일을 하면서 머릿속에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를 떠올렸던 적도 있었다.


여행이란 단어는 언제나 설렘을 준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여행 가방을 꺼내는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혀 다른 하늘이 펼쳐지고, 숙소 창문을 열면 처음 맡는 바람이 스며드는 곳, 도시의 소음 자연이 보이는 곳, 매일 듣는 익숙한 언어가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이국적인 언어, 처음 보는 음식과 과일을 맛보면서 맛을 음미하는 시간, 저녁이 되면 어제와 다른 바다의 노을이 나를 맞이하는 삶.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여행을 하는 게 일상이 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할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만약 여행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일상이 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질까? 매일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은 계속될까, 아니면 그마저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려 무뎌질까?


10년간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일본인

10여 년 전 유럽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일본인이 생각났다. 당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얼핏 보기에도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배낭 크기로 봐서는 단순히 한두 달 여행이 아니라 아주 장기간 여행하는 걸로 보였다. 같은 숙소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대화를 했다. 그는 '10년 간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다. 지금은 5년째이며, 절반을 채웠다고 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10년이라고? 보통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1년 정도를 한다. 길어봤자 2년이 최대이다. 그런데 10년째라고 하니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폭발했다.


"그렇게 오래 여행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요?" 나의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10년 동안 여행만 하려면 돈이 꽤 든다. 2014년 당시 세계여행 1년에 대략 3천만 원 정도가 들었다. 10년이면 3억이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순간 혹시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금수저인가? 생각을 했었다. 그는 예전에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숙소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현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고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휴양지는 잘 가지 않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돈을 아껴서 여행을 하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사는 대신에 여행을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년 여행을 마치고 나면 이제 무엇을 하실 거예요?" 나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는 무역 관련 자격증이 있어서 그 일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여자친구가 있어요?"라고 질문했다. 그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예전에 있었는데 여행을 시작하면서 헤어졌어요"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다

국내 어느 유명한 여행 작가의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돌아올 곳이 있을 때 여행을 가야 그것이 여행이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다. 그리고 국제 거지이다” 이 문장은 내게 꽤 여운을 남겼다.


만약 매달 통장에 건물 임대료가 천만 원씩 자동으로 들어오는 금수저라면 여행만 하는 삶이 가능할지 모른다. 노동의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여행이 곧 ‘일상’이 될 수 있다. 1년에 6개월은 한국에 있고, 6개월은 여행을 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우리의 삶은 상위 5%의 삶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매달 생활비와 월세, 학비, 각종 고정지출을 감당해야 한다. 설렁 저런 금수저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30살이 넘으면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놓고 어떤 특정한 조직에 소속되어 일을 한다. 40살, 50살까지도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우리는 30대를 지나면서 현실적인 삶을 영위한다. 매달 날아오는 고지서와 신용카드 대금을 확인하고, 건강보험료를 납부하며 연금도 매달 넣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생각하고 안정적인 삶과 2세를 원한다. 요즘 비혼이나 딩크가 많다고 하더라도 자유로운 인생을 계속하기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만 하고 산다고? 현실은 국제 거지이다.


또 하나,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생계’와 연결되면 더 이상 순수하게 즐기기 어렵다. 여행을 콘텐츠로 만들어 돈을 번다면, 단순히 내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고 싶어 할 여행’을 해야 한다. 유튜브를 한다면 조회수에 연연하게 되고, 주목받기 위해 원하지 않는 연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강남 건물주라면 상관없겠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감에 쫓기고, 편집자의 눈치를 보고, 독자의 반응을 고려하며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행은 더 이상 ‘쉼’이 아니라 또 다른 ‘업무’가 된다.


유튜버 중에서 가장 가성비가 딸리는 것이 여행 유튜브이다. 비행기 티켓, 호텔비 등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서 웬만하면 수익권에 진입하기 힘들다. 집 전세를 팔고 세계여행하는 유튜브 부부가 있다. 물론 아직 자녀가 없어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영상들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면 뭐 하지? 노후대비는 어떻게 할까? 영상에서는 가난한 콘셉트로 나오지만, 알고 보면 다른 계좌에 배당주를 10억 넣고 매달 500만 원씩 받는 사람이 아닐까? 아니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금괴라도 20개를 어디 금고에 보관 중인가?



나이가 드니 배낭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나는 예전에 학교 다닐 때 평생 교복만 입고 다닐 줄 알았다. 내가 교복을 벗어던지는 날이 올까?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어느덧 40대가 되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세월은 흘러버렸다. 이처럼 나이가 들다 보니 또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배낭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안락한 보금자리와, 날 반겨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무 데서나 자고, 싼 음식을 먹고, 걸어 다니고, 돈을 아낄 수 있다. 지금은 다르다.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고, 숙박비를 아끼려 야간버스를 타면 허리가 아프다. 예전에는 하루에 12시간도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무릎을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10인승 호스텔에서 잘 잤는데, 지금은 옆에서 누가 부스럭 소리만 나도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전에는 배낭 하나만 있었지만 지금은 각종 약(?)이 필요하다. 이러다 아마도 60살이 되면 패키지여행이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지도를 보고 일일이 걸어서 다닌 것보다 누군가의 인솔에 이끌려서 따라다니는 것을.


또한 사람들 간의 관계도 녹녹지 않다. 예전에는 낯선 사람들 틈에 끼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20대일 때 40대를 어떻게 봤던가? 그냥 아줌마, 아저씨들이 여행을 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굳이 그들과 어울리고 애쓰지 않았다. 이제는 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들이 나를 봤을 때는 그냥 '한명의 아저씨'에 불과하다. 일부러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지갑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은 좋다

오늘도 나는 수많은 통장 잔고를 보고 한숨을 내쉰다. 물가는 날이 갈수록 올라가고 월급봉투는 제자리인데 지출은 늘어난다. 벌써부터 길어진 노후가 걱정이다. 허약한 체질이라 병원에 갈 일은 점점 많아지며, 연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고 있다. 미국 나스닥 주가를 매일 체크하고 엔비디아 주식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을 한다. 그러면서 "돈이 10억쯤 있다면 사표를 제출할 텐데"이라는 상상을 매일 한다.


이와 같은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나는 여전히 여행을 사랑한다. 낯선 장소에 몸을 던지는 순간, 공기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지는 그 느낌. 처음 걷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풍경, 알 수 없는 언어로 주고받는 웃음, 첫 모금의 로컬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의 시원함. 이런 감각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휴가를 기다리면서 달력에 체크를 한다. 여행지와 관련된 책을 보면서 앞으로의 여행을 생각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물론 그 형태는 조금 바뀔 것 같다. 예전처럼 무작정 하루 종일 걷거나, 음식을 아무거나 먹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것이 주는 설렘과 감흥이 60대가 되면 꽤 달라질 듯싶다. 많이 보는 것에서 깊게 보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또 '이만기의 동네 한 바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행을 하게 될 거 같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행위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일상인가? 그리고 제목처럼 여행이 일상이 된다면 삶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글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오늘도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출근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철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1500원 아메리카노로 잠을 깨우고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지금이라도 10억 로또에 당첨되면 55세까지는 여행만 하는 삶을 선택할 거야!"


이미지 챗 gpt 생성






keyword
이전 29화태국과 라오스, 닮은 듯 다른 두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