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10년 후쯤 퇴직하면 어디서 살면 좋을까?”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이 좋지만 겨울이 춥다. 유럽은 비싸다. 따뜻한 남태평양 섬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가 딱이다. 사계절 내내 춥지 않고, 여유로운 일상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생활비가 감당 가능한 곳이다. 혼자 조용히 사색하며 지내도 좋고, 연인과 함께 행복을 나누어도 좋을 곳. 가끔은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같이 지낼 수 있는 곳. 이런 좋은 곳이 어디일까? 몇 가지 기준을 세워보았다. 기준은 ①한국에서 가까운 곳 ②물가가 저렴한 곳 ③치안이 좋은 곳 ④적당히 즐길거리가 있는 곳 ⑤인프라(병원, 상점)가 좋은 곳이다. 그러자 나에게 어울리는 후보지가 몇 군데 정해졌다.
1. 태국 치앙라이 – 고요한 북부 도시, 아름다운 자연과 적당한 도시 인프라
2. 라오스 비엔티안 – 순박한 사람들, 느릿한 속도, 조용한 수도
3.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영어 사용 가능, 의료 인프라 뛰어남
4. 베트남 냐짱 – 도시와 바다가 공존하는 해변 도시
몇 년 전, 태국에서 살 때 푸껫을 여행한 적이 있다.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햇빛에 반사되는 에메랄드빛 물결, 석양 질 무렵의 고요한 해변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다. 여기서 배를 한 시간 타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더 비치》의 배경인 꼬 피피(Phi Phi) 섬에 도착한다. 그곳의 해변은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니!! 정말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2박 3일 정도 지낸다면 좋을 듯했다. 나는 일정상 하룻밤만 묵었다. 그런데 만약 한 달, 두 달, 혹은 6개월을 거기서 살아라고 한다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면 말은 또 달라진다.
꼬피피 섬처럼 한두 번 가봤을 땐 감탄이 나오지만, 은퇴 후 매일 살아가는 공간이라면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집밥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풍경,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동네처럼 느껴지는 거리감이 중요하다. 푸껫도 마찬가지다. 푸껫이란 곳은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너무 많다. 또 물가도 비싸다. 은퇴해서 노후생활을 한다면 중요한 것은 건강과 함께 재정적인 문제이다. 생활 물가가 비싸다면 곤란하다. 푸껫에서는 웬만한 식당에서 밥 한 끼 먹으면 우리 돈 만원은 나온다. 그런 물가라면 굳이 동남아에서 살 이유가 없다. 또 주요 관광지는 몇 번만 가보면 더 이상 큰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즉 “여행과 일상은 다르다.” 휴가로는 완벽한 도시도, 실제로 ‘살기’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베트남에서 은퇴 생활을 한다면 우선 호찌민이나 하노이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대도시의 번잡함이 싫다면 그다음으로는 다낭을 생각할 것이다. 다낭도 좋다. 한국에서 수시로 비행기가 날아오르며 '경기도 다낭시'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 인프라가 있다. 로컬 마을도 가깝고 휴양지도 가깝다. 생활물가도 호찌민이나 하노이보다 낮다. 다낭에서 은퇴생활을 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바다가 예쁘지 않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바다는 한국의 해운대처럼 다소 밋밋하다. 우리가 보통 동남아 휴양지를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예쁜 바다가 아니다. 이는 바다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베트남에 있는 바다는 대체적으로 남중국해에 속한다. 이 바다는 수심이 깊고 파도가 세다. 그래서 바닷물은 짙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동남아의 투명하고 에메랄드빛 바다는 아니다. 산호도 많지 않아 물속 풍경은 단순하다. 스노클링이나 바다 스포츠를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반면 태국에 있는 바다는 타이만과 안다만 해에 속한다. 햇빛이 바닥까지 닿아 바닷물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난다. 특히 안다만 해는 석회암 섬과 산호초가 많아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바다로 꼽힌다. 은퇴 생활을 한다면, 매일 아침 눈부신 바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나짱도 남중국해에 속한다. 하지만 다낭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다낭은 대양 같은 바다라 파도가 크고 물빛이 짙은 파란색이다. 반면 냐짱은 만 안쪽에 있어 바다가 잔잔하고, 햇빛을 받으면 청록빛으로 반짝인다. 섬들이 주변을 둘러싸 파도를 막아주고, 산호가 발달해 물속 풍경도 다채롭다. 즉, 푸껫이나 보라카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다낭에 비해서는 훨씬 예쁘다.
또한 냐짱은 단순히 예쁜 바다를 넘어, 도시와 바다가 공존하는 구조이다. 도시 중심에 바다가 있다는 것, 그건 단지 풍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꾼다. 도심과 해변의 거리가 무척 가깝다. 해변에서 도보 5~10분만 걸으면 아파트, 병원, 마트, 시장, 카페가 줄지어 있다. 푸껫처럼 바다를 보기 위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바닷가를 따라 잘 정비된 산책로와 벤치, 야자수가 줄지어 있다. 매일 아침마다 현지인들과 외국인들이 해변을 함께 걷고 수영을 즐길 수 있다. 먹는 것도 선택의 폭이 넓다. 조금만 걸으면 로컬 시장에서 신선한 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요리가 귀찮다면 인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바다를 보며 식사할 수도 있다. 즉, 이곳에서는 ‘살면서 바다를 즐기는 삶’이 가능하다. 냐짱 국제공항도 있어 여차하면 대도시나 혹은 한국으로 올 수도 있다. 즉 이곳은 은퇴지로서 최적이다.
냐짱에서의 하루를 상상해 보자. 여행자와 현지인의 어디 반쯤 걸쳐져 있는 삶. 로컬 생활을 하다가 언제든지 여행자 모드로 변신할 수 있다. 아침에는 커피 한잔, 그리고 해변 산책, 로컬 시장에서 신선한 재료 구입, 해산물 요리. 저렴한 물가. 주머니가 넉넉하면 시내의 콘도에 살면 되고, 부족하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에 거주하면 된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게 바다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하루다.
해변을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무수히 많은 야자수들이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 오후에 더울 때에는 야자수 그늘 아래 벤치에서의 휴식, 근처 노점상에서의 시원한 코코넛 주스. 만약 일상이 무료해지면 인근 나라로의 여행.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노후 생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