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히말라야 산맥이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있는 곳, 눈으로 덮인 웅장한 설산의 이미지가 네팔을 대표한다. 그 외에는 가난한 내륙국가라는 인상, 한국으로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등의 이미지이다. 다른 것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인도의 경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곳이다. 네팔의 경우 여행지로서는 '히말라야 등반'이외에 딱히 부각되지 않는 곳이다. '네팔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면 '등반하려 가는 거야?'라고 되묻기도 한다. 실제로 네팔을 여행하는 사람들 90% 이상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서 간다. 나머지 10% 남짓한 사람들이 불교 유적지나 혹은 기타 장소를 여행한다.
예전에 네팔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친구에게 “너도 히말라야 등반해 봤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남들 다 하는 건데,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하니,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럼 거기서 뭘 하지"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네팔 여행을 계획하면서 처음에는 트레킹을 계획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안나푸르나 ABC 트레킹 코스 등은 8박 9일 일정이 기본이었다. 물론 바쁜 직장인을 위한 2박 3일 속성 코스도 있다. 그러나 짧은 일정 안에 트레킹까지 하려면 다른 도시들을 포기해야 했다. 7박 8일이라는 일정은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트레킹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나 혼자서 배낭을 메고 산에 가는 것이 아니다. 입산 허가를 받아야 하며, 현지 가이드인 셰르파도 고용해야 한다. 이 모든 비용을 혼자 부담하려니 부담스러웠다. 가난한 나에게는 사치다. 그래서 결국 히말라야 등반을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다른 여행할 곳이 어디에 있지?라고 찾아보았다.
네팔에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바로 ‘인도의 순한 맛’이다. 지리적으로 네팔은 인도와 이웃하고, 두 나라는 남아시아 문화권에 속한다. 종교, 문자, 생활양식에서 공통점도 많다. 하지만 여행자가 직접 느끼는 분위기는 꽤 다르다. 인도는 매력적이지만 만만치 않은 여행지다.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고, 그들의 관심은 때로는 너무 적극적이다. 택시를 탈 때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흥정을 하다 보면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길 위에서는 스스로 가이드라며 따라붙는 사람이 있고, 예상치 못한 ‘추가 비용’이 붙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인도 여행은 늘 긴장을 풀 수 없다. 장점도 있다. 장점도 있다. 인도 사람들은 정이 많고 잘 웃는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친근함 속에 언제 돈을 더 쓰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렇듯 따뜻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가 인도다.
네팔은 조금 다르다. 겉으로 보면 인도와 비슷하다. 힌두교 신자가 대다수이며, 음식이나 옷차림, 축제도 닮았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한결 조용하고 차분하다. 말수가 적고, 억지로 다가오는 경우도 적다. 흥정도 비교적 단순하다. 그래서 여행자가 받는 피로감이 훨씬 덜하다. 인도가 강렬한 색이라면, 네팔은 그 색을 은은하게 덮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말도 있다. “네팔 사람들도 인도 사람한테 삥 뜯긴다.” 농담이지만, 인도가 이 지역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남아시아라는 지역을 말할 때 인도를 빼놓기는 어렵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부탄 등이 같은 문화권에 속하지만, 중심에는 늘 인도가 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이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면, 남아시아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나라는 단연 인도다. 즉 인도는 이 동네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네팔은 인도보다 훨씬 순하다.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면서도 분위기는 훨씬 온화하다. 그래서 인도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네팔은 좋은 대안이 된다. 인도의 강한 개성과 매력을 간접적으로 맛보면서, 훨씬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인도의 순한 맛, 네팔’이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네팔의 국민 여행 코스는 수도 카트만두와 그 주변의 파탄, 박타푸르다. 이 3대 도시는 네팔 문화유산의 중심지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거리마다 중세 양식의 사원과 목조건물이 늘어서 있고, 좁은 골목길 곳곳에는 장인들의 손길이 담긴 공예품들이 가득하다. 다만 입장료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식으로, 현지인과 외국인의 가격이 다르다. 현지인은 무료이거나 몇백 원 등 아주 저렴하지만 외국인들은 1~2만 원이다. 뻥튀기도 이런 뻥튀기가 없다. 그러나 티켓 검사를 수시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매해야 한다.
여행자들은 이 3대 도시를 둘러본 뒤, 포카라로 이동한다. 포카라는 바다가 없는 네팔의 휴양지이자, 히말라야 등반의 거점이 되는 도시다.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등반을 시작한다. 트레킹 코스는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29박 30일까지 다양하다.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선택할 수 있는 코스도 다양하다.
나는 트레킹 대신 포카라 근처에서 히말라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산을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일출 무렵,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히말라야 등반을 포기하면서 여행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가이드북을 보니 국민 코스 이외에 부처가 활동했던 룸피비나 혹은 사파리를 즐길 수 있는 치타완 국립공원 등이 있었지만 거리상 가기가 힘들었다. 어디가 좋을까? 여행을 많이 하다 보면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이 알고 있는 곳'을 가고 싶을 때가 많다. 아직 여행자의 발길이 뜸한 곳. 그러나 여러 가지 풍경이 아름다운 곳. 그런 곳을 찾고 싶은 욕망에 빠져들 때가 있다. 왠지 네팔에서는 이런 곳을 하나 발견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며칠을 인터넷에서 찾던 중 드디어 나의 니즈에 맞는 곳을 발견했다. 바로 Patlekhet라는 도시이다. 구글 지도로 보면 수도 카트만두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한국어로 어떻게 읽어야 하나? 파트레켓? 바틀렛?
가장 눈에 띈 곳은 Patlekhet Eco Farmhouse라는 숙소였다. 아고다 평점이 무려 9.9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점수였다. 평점이 조작되었나? 뭐 아무렴 어떠리. 어차피 그 지역에는 그 숙소 이외에 다른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여행자들이 많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마음으로 예약을 했다. 가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탄 뒤, 한 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카트만두에서 총 5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과 눈인사를 한다. 차 안에서는 신나는 네팔 노래가 스피커에서 뿜어 나온다. 당연히 에어컨은 없다. 언제 작동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선풍기 두세 대가 힘에 부치는 듯 돌아가고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은 아름다웠고 평화로웠다. 음악을 들으면서 바깥을 보면서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숙소를 찾는 것이 또 일이었다. 개발도상국의 시골은 구글 지도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분명히 여기로 5분 정도 가면 나와야 하는데 막다른 길이 나온다. 어찌어찌 현지인들에게 물어서 40분 만에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어느새 해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주인장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헬로! "
그곳은 완벽한 숙소였다.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서 가히 Best 3 안에 속했다. 숙박비가 저렴했고, 조식·중식·석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시설은 조금 낡았지만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정리정돈도 좋았다. 무엇보다 주인장이 매우 친절했으며,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감탄할 만했다.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서비스와 친절이라면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었다. 여유만 있다면 일주일은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Patlekhet은 유명한 유적지나 대단한 명소가 있는 곳은 아니다. 분지로 둘러싸인 이곳은 풍경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한다. 아침에 숙소에서 식사를 마친 뒤 산책을 나서면, 길에서 아침을 걷는 할아버지와 눈인사를 나눈다. 자기 몸 절반 크기의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어린 학생이 “헬로”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지나가던 개도 처음 보는 내가 낯선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따라온다. 당연히 주변에 외국인은 없다. 네팔의 흔한 시골 마을이 아니다. 가히 이곳은 '네팔의 숨겨진 여행지'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다.
마을 이곳저곳을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는 꼭 봐야 할 곳이나 꼭 먹어야 할 음식 같은 것이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시간 나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렇게 숙소 근처를 걷다가 작은 찻집 하나를 발견했다. 겉모습은 낡고 허름해서 식당인지 찻집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메뉴는 단순했다. 나는 짜이 한 잔을 주문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서 주전자에서 차를 끓인다. 주전자는 빛바랬다. 한국의 위생관념이라면 아마도 선뜻 마시기가 꺼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는 여행지이니까. 가격은 30루피, 한국 돈으로 약 300원 정도였다. ‘이렇게 싸도 되나?’ 잠시 생각했지만, 곧 현실을 떠올렸다. 네팔과 한국의 물가 차이는 약 12배다. 그러니까 300원은 여기서 체감상 3,600원 정도에 해당한다. 나는 3,600원어치의 차를 마신 셈이었다.
찻집 안에는 오래된 선풍기 하나가 덜덜거리며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낡은 테이블과 의자도 오히려 정겨웠다. 창밖으로는 푸른 계곡과 부드러운 언덕이 이어졌다. 햇살이 산 위로 내려앉고, 바람이 선선이 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하고 달콤한 향이 돈다. 네팔 어디에서나 흔히 맛볼 수 있는 짜이이지만 여기는 좀 더 특별했다. 오래된 선풍기, 낡은 테이블, 한 잔의 짜이. 값비싼 장식이나 화려한 메뉴가 필요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단돈 300원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소도시 여행의 매력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사람은 많지 않아 복잡하지 않다. 외국인이라고 덤텅이를 쓸 염려도 없다. 영어는 통하지 않지만 몸짓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특히 내가 찻집에서 느낀 행복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꼈듯, 소도시 여행은 때론 예상하지 못한 행복을 준다.
캄보디아에 앙코르와트만 있는 것이 아니듯, 네팔에도 히말라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경제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사람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한 숨은 마을들이 있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소가 있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진심이 있는 여행지가 곳곳에 있다. 그런 점에서 Patlekhet은 완벽한 여행지이다.
네팔. 우리에게는 가난한 나라로 인식되지만,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있는 곳. 다음번에 다시 가게 된다면 꼭 그 숙소와, 찻집을 찾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