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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종욱 찾기 - 여행지에서 인연을 찾았나요?

당신의 김종욱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화 <김종욱 찾기> 영화 초반, 영화는 인도의 한 기찻길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수많은 인파, 혼잡한 기찻길에서 주인공 임수정은 배낭을 메고 떠나려는 기차 안을 본다.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쫓아가지만 결국 놓치고 기차는 떠난다. 이 영화는 ‘첫사랑을 찾아주는 회사’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임수정은 인도에서 만난 첫사랑 김종욱을 잊지 못해, 그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공유는 냉철한 일처리로 의뢰를 맡지만,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그리움을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간다. 영화 속 절반은 인도의 낯선 거리에서, 절반은 서울의 익숙한 풍경 속에서 펼쳐진다. 인도 특유의 색감과 음악,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이라는 테마가 묘하게 어울려, 본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여행지에서 김종욱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여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행을 가보니 김종욱은 없더라... 대신 배 나온 아저씨들만 있더라.”

남자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임수정은 없더라... 대신 슬리퍼 질질 끄는 남자 여행자들만 있더라.”


그렇다면 정말 여행지에서 김종욱이나 임수정은 없는 걸까? 글쎄,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 돌아보면 나 역시 여행지에서 그런 ‘잠깐의 인연’을 여러 번 만났다. 비록 영화처럼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때마다 묘한 여운이 남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몇 개 썰만 풀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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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간 김종욱은 많았지만...

첫 번째 사연 : 2013년, 나는 필리핀 클락에서 두 달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리핀은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학생 대부분은 한국인이지만, 일본인도 좀 있었다. 해외에서 가장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외국인은 일본인이다. 역사적 갈등이 있을지라도, 서로 문화와 생활 방식이 비슷해 마음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어학연수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두 명의 일본 여자 학생이 새로 들어왔다. 얼핏 봐도 대학교 1학년 내지 2학년으로 보인다. 아마도 대학을 휴학하고 몇 달 동안 영어를 배우러 온 듯했다. 필리핀 연수가 끝나기 2주쯤 전, 나는 그중 한 명과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졌다.


우리는 상대를 봤을 때 '저 사람하고는 친해질 수 있겠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인상이나 느낌 등등이 왠지 나와 어울릴 듯싶은 경우 말이다. 이럴 때에는 실제로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일본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짧은 영어로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남자들이 일본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 학생은 흔히 떠올리는 일본 여자 스타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일본어로 하면 ‘카와이’라고 할 만한 그런 외모였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나는 필리핀 연수를 마치고 아일랜드로 떠나야 했다. 한 2~3주만 더 있으면 관계가 진전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말 아쉬웠다. 일정을 변경할 순 없었다. 서로의 라인 아이디를 교환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갔다. 아일랜드에서 우리는 손 편지를 주고받았다. 2013년이면 불과 12년 전의 일이다. 메신저 라인이나 페북 메신저로도 연락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손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참 낭만적이다. 예쁜 편지와 봉투를 사서 또박또박 손으로 적으며, 우표를 붙이고 나서 우체국에 가야 했다. 이처럼 나는 아일랜드에서, 그녀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전했다. 그리고 “연수가 끝나면 내가 일본에 꼭 놀러 갈 테니, 그때 꼭 만나자”라고 약속했다


연수가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일을 했다. 이후 어느 날 일본 도쿄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비행기 티켓도 예매하고 만날 일정까지 정했다. 도쿄에 어디 어디를 가보자. 그런데 출발 며칠 전 갑자기 건강 문제로 일본행은 취소해야 했다. 다음에 가려고 했는데 일에 빠쁘다는 핑계로 결국 가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은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였고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나 스스로 기회를 흘러가게 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크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때 도쿄로 갔어야 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고, 그렇게 인연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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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연 : 2019년쯤이었나, 라오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4박 5일 일정으로 라오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라오스 현지 친구들을 만나고, 마지막 날인 듯싶다. 나는 현지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깎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머리 이발 비용이 1만 원 정도지만, 라오스에서는 2천 원이면 깎을 수 있으니 가난한 나에게는 좋았다. 미용실 안에는 손님들이 조금 있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거는 편이 아니다. 그때는 아마도 다른 사람으로 빙의가 되었나 보다. 나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미용실 직원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 직원은 아주 앳된 얼굴이었고, 가위를 직접 들고 손님의 머리를 깎는 건 아니어서 아마 수습 직원 정도로 보였다. 나는 예전에 라오스에서 2년 동안 봉사활동을 한 경험이 있어 라오스어를 할 줄 알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놀라웠다. 그 친구는, 라오스 구석구석을 여행해 본 나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아주 시골 지역 출신이었다. 전기가 들어온 지는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고, 학교에 다닌 적도 없다고 했다. 대신 사원 같은 곳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조금 받았다고 했다. 순간, 아직도 세상에는 이렇게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미용실에서의 짧은 대화는 우리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우리는 서로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가끔 영상통화도 하면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었다. 만약 내가 그때 라오스에 살고 있었다면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로부터 8~9개월쯤 지나 다시 라오스를 찾았다. 이번에는 그 친구를 직접 만나 함께 메콩강변에서 밥도 먹고, 맥주도 같이 마셨다.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도 줬다. 나이 차이는 좀 났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 세계를 뒤흔들면서, 나는 더 이상 라오스를 갈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락도 뜸해지고, 그렇게 우리 사이는 서서히 흐지부지해졌다.

라오스 음식은 마치 전라도 한정식 같다.



세 번째 사연 : 예전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여행할 때였다. 빈은 로맨스 영화 Before sunrise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영화에서는 미국 청년과 프랑스 여인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그때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당시 지금도 있는 네이버 동행 카페에서 한국인 한 명과 연락이 되어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났다. 상대는 혼자서 여행을 온 동갑의 여자였다.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이미 1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이니까. 아마도 빈의 어떤 카페였나. 우리는 오페라를 같이 보려 가기로 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각 나라에서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영국에서는 뮤지컬을 보고, 프랑스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 하고, 독일에서는 맥주와 소시지를 먹어야 하는 등등. 그렇다면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오페라를 들어야 한다. 국립 오페라 극장인가? 굉장히 비쌀 것 같지만 맨 뒷좌석에서 서서 보는 것은 그 당시로 몇 유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우리 돈 5천 원 미만이었을 듯.


우리는 오페라를 보고 난 뒤, 빈에 왔으니 당연히 비엔나커피도 맛보러 갔다. 그리고 커피와 함께 즐기는 대표 케이크, 자허토르테(Sachertorte)를 맛보았다. 자허토르테로 유명한 곳은 Hotel Sacher(호텔 자허)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다. 단 하루의 만남이었지만 오페라를 보고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등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리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연락을 이어갔다. 나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그녀는 서울에 살았다. 토요일 아침 일찍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그녀를 만나고 다음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역까지 이동 시간을 포함하면 편도 5시간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KTX마일리지가 계속 쌓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먼 거리와 바쁜 일상 때문에 점점 만나기 어려워졌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부산에서 서울은 너무 멀었다. 대전 정도만 되었어도... 연락은 이어졌지만 점점 흐지부지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당시 마셨던 비엔나커피와 자허토르테 케이크


네 번째 사연 : 이것도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를 여행하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곳이다. 발칸반도 여행이라고 하면 대부분 동유럽을 떠올리며, 크로아티아 정도를 아는 경우가 많다. 또는 발칸 내전과 세르비아, 코소보 내전 같은 유럽의 화약고를 떠올릴 수도 있다.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는 아직 외국인 여행자가 많지 않은 도시였다.


나는 그곳을 언제나처럼 혼자 여행하고 있었다. 저 멀리 내 또래로 보이는 동북아시아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해외에서 지내다 보면 한중일 사람을 스타일과 분위기로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다. 일단 스타일로 보아 중국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내 감으로는 거의 한국인일 확률이 90%였다. “여자 혼자서 스코페까지 여행을 왔나?”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말을 걸까 망설였다. 소심한 성격은 지금이나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게 “Are you Korean?”이라고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 내가 본 바로 그 여자였다. 내가 “한국분이세요?”라고 물으니, 맞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해외에서, 그것도 한국인이 거의 없는 동유럽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의 중앙 광장에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그 순간의 반가움과 묘한 설렘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서울 출신으로, 지금은 동유럽과 발칸반도를 혼자 여행 중이었다. 나이도 나와 동갑이라서 금방 친해졌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는 그 짧은 순간, 낯선 땅에서 마음이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음 일정이 3일 동안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휴양 도시 오흐리드, 그리고 그다음에는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까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오흐리드와 알바니아를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알바니아, 들어본 적 있는가?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북한’으로 불리며, 악의 축 국가 중 하나로 꼽혔다.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니 플래닛의 저자 토니 휠러가 지은 여행책 ‘나쁜 국가 여행지’ 10개국에도 포함될 정도였다. 여기를 여행한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적다. 문제는 숙박이었다. 알바니아에는 그때 생각보다 숙소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트윈룸을 잡았다. 방은 하나였으나 침대가 두 개였다. 덕분에 숙박비도 아낄 수(?) 있었다. 당시 호텔은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깔끔했고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48시간 동안 같은 곳에서 있었다. 젊은 남녀가 한국인이 거의 없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며칠 동안 함께 여행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 그것은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과 긴장감이 공존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다음 날,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코를 엄청 골더라고요.” 나는 그때까지 내가 코를 고는 줄 몰랐다. 알바니아 다음에는 각자의 여행지가 달라졌다. 이후 한국에서도 몇 차례 더 만났지만 인연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의 광장.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이제는 추억으로...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꼭 영화처럼 완벽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잠깐의 만남, 짧은 대화, 커피 한잔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울릴 수 있다. 또 ‘김종욱 찾기’란, 누군가를 꼭 만나 사랑을 이루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열고, 예상치 못한 만남 속에서 작은 설렘과 감동을 느끼는 경험이다. 여행지에서 스쳐간 사람들, 잠깐이라도 마음을 나눈 이들은 모두 나만의 김종욱, 나만의 임수정이었다.(글 쓰다 보니 아쉽네..)


손 편지를 열어볼 때의 설렘, 라오스 메콩강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바라본 노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동했던 날, 알바니아 트윈룸에서 느낀 긴장감과 두근거림…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은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쉬움이나 후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행지에서의 만남이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하나 나만의 이야기가 된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직 혼자라면, 그리고 여행을 떠난다면 완전히 마음을 비워두지는 말자.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마음을 열고 다니니까. 마음을 조금 열고, 눈과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의 김종욱 혹은 임수정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설렘과 감동은 오래도록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남을 것이다.

영화 '김종욱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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