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제발 그 무례를 건너지 마오

by 김치즈

이젠 무뎌질 법도 한데 병을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가 불쑥 억울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리고 이런 자격지심이 만든 심연에 불이 붙어

감정의 불길이 타인에게까지 번지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의 경우 출퇴근길 지하철이 대부분 혼돈 그 자체였는데 달리는 고철 덩어리에 탄 모든 사람의 환멸 에너지로 지하철이 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발을 욱여넣어 내 몸뚱이 하나 추가하고 싶어도 도무지 염치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지하철을 그냥 떠나보내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조금이라도 숨 쉬며 가고 싶은 나의 의지보단 무조건 지금의 열차를 타고 말겠다는 뒷사람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괏값이 컸다.


하지만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앉을자리가 생겼고 나는 냉큼 자리에 앉아

다음 역에서 내리는 사람 앞에 서 있었던 나의 뽑기 운에 셀프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불행을 안고 태어난 것을 자각이라도 하라는 것처럼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나에게서 도무지 떨어지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이런 불상사는 마음에 얹혀 나의 일상에 탈을 낸다.


"피부가 그게 뭐야? 내가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 알려줄까?"


퇴근길이라 이미 준비된 체력을 모두 소모한 나에겐 너무 가혹한 인성 시험이 시작됐다.


‘피부 문제가 아니라 희귀병이라 그렇고요.

아무리 뭘 처바르고 처먹어도 소용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제발 닥치세요’


가장 깊숙이 자라고 있는 솔직이란 존재가 진심을 냅다 큰 소리로 외치기 전에

사회생활로 숙련된 인성과 아직은 죽지 않은 유교걸이라는 존재가 나의 화를 잠시 수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준비된 인성 시험은 30분형 서술형 문제였고 나의 심연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례의 강을 건너기 위한 돌다리 공사인 듯 속 시끄럽게 이어졌다.


"젊은 사람이 피부가 그러면 못써. 관리해야지!

안 그럼 주변 사람들이 싫어해~ 연애도 못 하고 평생 혼자 늙어 죽는다고"


이건 정말 위기다.

하마터면 지하철에서 한참 어르신에게 욕을 할 뻔했다.


당첨된 1회 피부 관리 체험이 사실은 30회 피부 시술권을 강매하려는 영업 수법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어쩌구 연고를 발라야 피부가 좋아진다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이미 무례를 인내하는 예의는 이미 밑천을 드러냈고 대꾸할 적절한 단어도 아는 바가 없는 난 늘어나지도 않는 소매 끝으로 손등을 가리고 어르신 대신 나를 다그쳤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나

이 자리에 앉은 것? 손등에 있는 종양들을 미리 제거하지 못한 것?


삶의 가치는 자아의 성장에 있다고 믿지만

번번이 옥죄어오는 겉모습이 나의 가치를 퇴색하고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그때의 한마디가 아직도 내 안에서 오래 머물러 자란다

아니, 그 말에 누가 숨을 불어넣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의 행동거지를 검열한다.


그래서 나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배려는

타인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마디가 누군가의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

섣불리 나의 감상을 덧붙이지 않는다. 타인이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나의 손을 거둔다.


누군가의 심연을 건널 무례의 다리를 만드는 일이 없길 오늘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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