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소이 May 29. 2023

옳음에 대하여

산산(山山)이 04화





저는 결국 오름에 올랐어요.


오름은 큰 화산의 옆쪽에 붙어서 생긴 작은 화산이에요. 기생 화산, 측화산이라고도 부른대요. 기생화산이라니 웃기죠. 기생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것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한쪽은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해를 입고 있는 것을 말하잖아요.


오름이 한라산에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화산 쇄설물이 굳어서 생긴 분화구 일뿐인데. 우리가 붙인 이름이 기생화산이라서 오름은 기생화산으로 불리고 있더라고요.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다는 게 참, 잔인한 행위라고 느껴졌어요. 무엇으로도 불릴 수 있었고, 어떤 의미든 가질 수 있었던 것들, 또 영겁의 가능성과 무한한 의미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것이니까요.


첫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대상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그 의미가 후대에까지 이어지곤 하잖아요. 우리가 변형되어 온 단어들의 어원을 배우는 것처럼. 의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더 잔인해요.


제가 너무 딴소리를 했나요.


아닙니다. 이런 생각들은 영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 역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대화의 주제를 틀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경하 씨도 편하게 말하세요.


아까 영주 씨가 뇌의 기능에 대해 잠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 머릿속엔 여러 뇌들이 존재합니다. 대뇌, 중뇌, 소뇌, 간뇌 따위 말이죠.


우리가 움직이고, 감각을 느끼고, 언어를 말하고, 기억하기 위해선 각각의 뇌들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신경계 조절과 호르몬 생성, 항상성 유지도 그렇습니다.


뇌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뇌의 기능을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또 언젠가 무언가를 깨달아 실수를 하지 않게 되는 것도 결국 모두 뇌의 역할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나 많은 뇌들이 제 머릿속에 들어있었군요. 생물 시간에 잠시 배웠던 것 같은데... 잊고 살았어요. 제 머릿속엔 관심이 없었나 봐요.


정정할게요.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가 잠시 기능을 상실했었던 거죠. 순간적인 압박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대뇌 때문에 저는 오름에 오르게 되었던 거네요...


오름에 오르는데 대략 이십 분 정도 걸렸어요. 오름의 정상에 도착한 시간이었죠. 고개를 들고 둘러봤어요.


저 멀리에는 수평선을 만들어낸 바다와 또 다른 오름들이 존재하고 있었어요. 주변의 억새들이 석양에 물들어 금빛으로 빛났어요. 아름다웠어요. 사람들에게 밟힌 풀들은 밟힌 대로 풀 내음을 풍기고, 꼿꼿이 서있는 풀들에게선 위압감이 느껴졌죠.


비록 해발 오백 미터 밖에 되지 않았지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손을 들어 한 움큼 움켜쥐면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매끄러운 능선을 뽐내는 한라산도, 반대편의 에메랄드빛 바다도,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목장들도, 제 손바닥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산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높은 산에 오르는 건 눈앞에 놓인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욕망 때문 아닐까.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면 너무 거대하고 웅장해서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굉장히 작아지니까요. 쉽게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잖아요.


비로소 오름에 오른 걸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후회는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결심하게 되었죠.


결심이요?


네. 한라산에 가야겠다는 결심이요.


영주 씨의 할머니께서 한라산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도요.


네. 신신당부를 하셨는데도요.



이전 03화 아비규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