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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소이 May 29. 2023

외로운 아버지

산산(山山)이 05화





한라산에서 겪었던 이야기는 조금 뒤에 말씀드릴게요. 한라산에 다녀온 뒤로 기이한 꿈을 꿨거든요.


네. 좋습니다.


저는 이박 삼일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할머니한테는 한라산에 간 일을 비밀로 해야 했어요. 어떻게 둘러댈까 걱정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저를 쓱 쳐다보시곤 피곤할 텐데 어여 저녁 먹고 잠이나 자라고 말씀하셨어요.


식탁 위에 쑥 인절미가 잔뜩 놓여있었어요. 저는 죄지은 사람처럼 쑥 인절미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켰어요. 그러고는 피곤해서 금방 잠자리에 들었어요. 목이 꽉 막힌 상태로 자서 그런지 돌아가신 아빠가 오랜만에 꿈에 나왔어요.


영주 씨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었군요. 몰랐던 사실이에요. 참, 유감입니다.


괜찮아요. 돌아가신 아빠를 돌아가셨다고 하지 뭐라고 하겠어요. 아무튼 아빠가 꿈에 나온 게 오랜만이었거든요.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따라갔어요.


아빠, 아빠 하며 부르는데 아빠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요. 제가 평소에 아빠 생각을 자주 하지 않아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걸까. 꿈이라서 그런지 아빠 얼굴이 더욱 기억나질 않았어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졌어요. 저는 하염없이 아빠의 뒷모습을 좇았어요.


어느 정도 걸었을까. 아빠가 걷는 걸 멈췄어요. 분명 이게 꿈인 걸 아는데도, 따라 걷는 게 힘이 들고 숨이 찼거든요. 한숨을 돌리는데, 아빠가 뒤를 돌아보셨어요. 시커먼 얼굴을 하고, 여기까지만 따라오래요. 그러고는 사라지셨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제가 산 정상에 서있더라고요. 그 산은 매우 익숙한 곳이었어요.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작은 산이었죠. 종친들 무덤이 곳곳에 있기도 했어요.


영주 씨 가족한테 굉장히 유서 깊은 산이네요.


네. 그럼요. 아빠가 살아생전에 그곳에서 농작물을 길렀거든요. 알타리며, 배추며, 감자며, 높은 곳에서 재배할 수 있는 모든 작물들은 닥치는 대로 길렀어요.


무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온갖 작물들을 심었어요. 그 산은 저희 집안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죠.


햇빛에 타 죽을 만큼 뜨거운 여름이 되면 아빠는 시내로 나가 김장 무우라고 적힌 종자씨들을 잔뜩 사 오곤 했어요. 아, 배추는 모종으로 심는 게 훨씬 수월해서 모종을 구입해 왔어요. 파종을 해야 할 시기였거든요.


여름에 파종을 합니까? 걷기만 해도 더운 날씨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니, 야속하네요.


경하 씨 가족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계시지 않나 봐요.


네. 제 가족들은 열심히 노동을 하셨지만, 아쉽게도 농부는 없습니다.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낡은 아파트를 관리하는 사람도, 고양이 밥을 챙겨 주는 사람도 계시지만, 농부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농작물 재배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혹시나 제 무지가 영주 씨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경하 씨를 추궁하려던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원래 겨울에 수확하는 작물은 중부 지방 기준으로 팔 월 중에 파종을 해야 하거든요. 김장 무는 구십 일간 생육하고, 김장 배추는 그보다 열흘 긴 백여 일 간 생육하기 때문에, 아빠는 꼭 배추를 먼저 심으셨죠. 아빠라서가 아니라 다른 농부들도 그랬지만요. 그래야 제때에 배추와 무 모두 같이 수확할 수 있거든요.


아빠는 죽은 작물로 가득한 땅을 정리했어요. 밭을 갈고, 퇴비를 뿌리고, 비닐을 깔았죠. 그리고 모종을 심을 구멍을 널찍하게 파셨어요. 어린 저는 먼발치에서 아빠의 노동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모종을 심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라 노하우가 필요했거든요. 모종 구멍에 물을 충분히 주고 배추 모종을 심은 다음에 흙으로 그 공간을 채워야 해요.


언제 한 번 아빠를 도와 모종을 심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가을이 되자 제가 심었던 배추가 성장하지 않았어요. 아빠가 심은 배추는 속이 꽉 찬 배추로 성장해 가는데, 제가 심은 배추는 아빠의 배추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었어요. 나중에서야 아빠가 말해주셨어요.


생장점을 건드려서 그래. 흙을 담을 때에는 배추의 생장점인 고갱이에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중해야 해.


제가 너무 어렸어요. 고작 일곱 살이었으니까요. 배추의 생장점을 알기엔 제가 겪는 성장통을 이해하기도 벅찬 나이죠.


그러면 영주 씨 아버지를 도와드리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네. 할머니랑 셋이 살았으니까. 마땅히 아빠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네요. 앞단의 단계들은 모두 아빠 혼자서 해야 할 몫이었어요. 저랑 할머니는 겨울이 되어서야 밭에 올라가 무와 배추를 수확하는 일을 돕곤 했거든요.


영주 씨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외로웠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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