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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소이 May 30. 2023

오백 원의 의미

산산(山山)이 06화





농부의 삶은 외로우니까요. 괜찮다면 외로운 아빠의 삶에 대해 더 이야기해도 될까요.


네. 저는 좋습니다.


누군가는 아빠의 삶을 알아주길 바랐어요. 그게 경하 씨가 될 줄은 몰랐지만.


아빠는 그렇게 팔 월이면 김장 배추와 무를 심으셨어요. 심는다고 끝이 아니었어요. 밭이 메마르지 않도록 물을 줘야 했고, 그 위에 웃거름을 뿌려서 영양분을 공급해야 했어요. 벌레와의 싸움도 계속되었어요. 벼룩잎벌레, 배추흰나비 애벌레, 진딧물까지 아빠의 배추를 탐냈어요.


같이 살자고 이파리를 내어주면, 고마운 줄 모르고 속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어요. 조금씩, 조금씩, 배추를 갉아먹었어요. 그렇게 벌레에게 잠식당한 배추는 아웃. 시장에서 상품성을 잃어버리죠. 아빠는 벌레들에게 배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파리 하나 내어주지 않을 심보로 벌레 방제에 힘썼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해 겨울에는 그렇게 힘들게 키워낸 무와 배추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어디서든 배추 농사가 풍년이라 배추 가격이 폭락한 거예요. 무 값도 덩달아 폭락했어요.


아빠와 거래를 해왔던 청과물 사장님은 백 원 더 싼 곳을 찾았다며, 올해는 거래를 못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어색한 웃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포장했어요.


아빠는 시내로 나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계약을 따와야 했어요. 시기를 놓치면 겨울 한파 때문에 무랑 배추가 꽁꽁 얼어버리거든요. 아빠는 마침내 시내에 있는 작은 마트와 거래를 하게 되었어요. 무와 배추 모두 개당 오백 원이었죠. 백 포기를 팔아야 오만 원을 벌었어요.


거래하기로 한 마트 트럭이 산으로 찾아왔어요. 저는 아빠를 따라 몸통만 한 배추를 가득 안고 마트 트럭에 실었죠. 옷은 금방 흙으로 더럽혀졌어요. 그렇게 실려 간 무와 배추는 마트에서는 천오백 원과 이천 원 사이에 팔렸던 것 같아요. 많이 사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싸게 팔렸죠.


오백 원밖에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아빠가 받을 수 있는 값은 오백 원이었어요. 마트 트럭이 그 오백 원짜리들을 잔뜩 실어 간 날이면, 아빠는 시내로 나가 통닭을 사 오셨어요. 기름에 너무 튀겨지고, 닭 비린내가 심한 오래된 닭이었어요.


그 통닭마저 그리워지는 날이 왔어요. 어느 날부터 마트 트럭이 산으로 찾아오는 날이 점점 뜸해졌거든요. 트럭이 아예 찾아오지 않자, 아빠는 시내를 돌아다녔어요. 다른 마트와 동네 청과물 가게 모두 배추 가격을 백 원, 이백 원 더 깎아 팔아 손님을 모으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죠.


더 이상 깎을 것도 없는 그 가격을 더 깎았습니까?


네. 가격은 밑바닥을 찍었어요. 아빠는 밤새 끙끙 앓으며 백 원을 내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오백 원을 고집했어요. 아빠의 고집으로 농작물은 팔리지 못해 시들어갔어요.


계약을 다시 따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어요. 절인 배추였죠. 커다란 고무 통에 무와 배추를 넣고 소금을 뿌려 하루 동안 절이는 거예요. 그러면 손님들은 절인 배추를 바로 사다가 양념을 해서 김치를 담글 수 있었어요.


오백 원을 고집하기 위한 아빠의 아이디어였죠. 아빠와 저, 그리고 할머니는 저녁이면 배추와 무를 고무 통에 옮겨 담았어요. 물을 가득 붓고 소금을 뿌렸죠. 아빠는 새벽에 다시 일어나 고무 통 안을 나무 막대기로 휘저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래에 담긴 배추들이 위에 놓인 배추보다 훨씬 짜지거든요. 골고루 절이기 위한 방법이었어요.


너무 피곤한 날에는 아빠조차 깊은 잠에 들어 일어나지 못했어요.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면, 제가 아빠 대신 밖으로 나가 있는 힘껏 고무 통 뚜껑을 열고는 나무 막대기로 배추들을 뒤집어야 했어요. 사실 제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어요. 옆집 닭이 울면 아빠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제 손에 들린 나무 막대기를 낚아채셨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오백 원을 벌 수 있더라고요.


농사가 그렇게 많은 이들의 손을 필요로 하는지 몰랐습니다.


아주 옛날 일이에요. 그러고 나서는 다른 작물을 재배해서 그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이듬해 겨울에는 배추 가격이 팔백 원으로 오르고, 또 그다음 해 겨울에는 천 원으로 올랐거든요.


그 가격도 제게는 값싸게 들립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소비자들한테 직접 팔 수 있는 매체가 없었어요.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직거래도 많이 하고, 농장을 홍보하기도 쉬워졌잖아요. 그때는 거래처가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소비자들한테 직접 팔았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겠죠. 아빠가 그 해 겨울을 계속 마음속에 품고 사셨나 봐요. 일기장에 그런 말이 쓰여있었어요.


고사리 같은 딸아이의 손이 소금물에 절어졌을 때,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그러시군요. 어린 영주 씨는 그 당시 어땠습니까?


저는 사실 행복했던 것 같아요. 배추를 소금에 절여 아빠를 도울 수 있다면, 이 세상 배추를 다 절일 수 있을 만큼. 제 손이 소금물에 녹아 없어지더라도 외로운 아빠를 혼자 두기 싫을 만큼. 전 행복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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