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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X세대론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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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Sep 25. 2024

4-1. X세대와 이데올로기

4장. X세대와 함께한 대한민국 사회

X세대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교육·언론 등 X세대가 자란 환경으로는 분명 지금 X세대의 정체성을 찾아보는 것이 어색해 보인다. 왜냐면 지금 X세대가 하는 행동과 생각을 보면 X세대가 성장하면서 보아온 사회환경과 교육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간간이 살펴보았지만,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서 그리고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서 나름의 과정을 유추해 보려 한다. 이것은 오로지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의한 것임을 미리 밝히니 참고해서 읽어주길 바란다.     

지구상에서 전범 국가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은 곳 중 하나가 한반도였고, 현재까지 전쟁 후유증도 가장 크게 앓고 있는 곳 또한 한반도일 것이다. 당시 일제 식민지하 조선은 자주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래 싸움의 새우 신세도 되지 못했다. 

 5천 년을 이어온 우리 영토는 외세에 의해 처절하게 난도질되었지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민족에게 식민지에서 독립시켜 준다면서 2개의 질문지를 내밀었다.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그 질문지에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강요하고 있었다. 너무나 잔인한 질문지였다. 답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고, 다른 답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부터 일제식민지까지 억압받고 살아온 민중은 자유로운 나라, 평등한 나라를 원했다. 누구든지 간에 억압과 착취보다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와 평등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주어지지 않고 강요되었고, 힘의 논리에 의해 찍어 눌러졌다. 

급기야 고래 싸움에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고, 1번 답을 쓴 사람이 38선 위쪽에 있으면 죽임을 당하기 쉬웠고, 2번 답을 쓴 사람이 38선 밑에 있으면 죽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당시 인텔리는 나름 식자층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굶고 헐벗은 민중에게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사회에서 이념문제는 밥그릇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동지’ 아니면 ‘적’ 둘 중 하나였다.      


한반도에서 이데올로기가 남긴 큰 상처 몇 개만 살펴보자. 

먼저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28주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시작되었다. 기념행사 도중 경찰의 말(馬)에 아이가 치여서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민중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민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심이 되어 친일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는 미 군정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미 군정은 이를 남로당의 선동으로 보고 제주도민을 좌파세력으로 몰아갔다. 육지에서는 토벌대로 서북청년회가 파견되었으며,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무장대를 만들어 봉기했다.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들어갔고, 1954년 9월 21일까지 크고 작은 진압 작전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의 학살이 자행되는데, 이는 사건 초기의 미 군정과 이후의 이승만 정부 그리고 남로당의 합작품이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는 14,000여 명에 이르며 이는 토벌대에 의해 78.1%가 무장대에 의해 12.6%가 살해되었다. 이는 밝혀진 숫자이고 실제로는 3만에서 8만의 민간인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1을 웃도는 수치이다. 

토벌대와 무장대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민간인 학살은 자행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제주도는 한마을 거의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두 번째 살펴볼 사건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이는 제주 4.3 사건과 연관이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국방경비대 14 연대 소속의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 군정은 인력충원이 급한 나머지 사상 검정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로당의 세포조직이 군대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 세포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14 연대였다. 10월 19일 오전 육군본부로부터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고, 이에 14 연대 소속 부대원들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병을 반대하자’는 선동에 찬동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0월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 발효와 더불어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10월 27일까지의 진압 작전에서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었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때 경찰·국군 및 우익세력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대대적인 숙군작업에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사건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시행됨에 따라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이다. 보도(保導)는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의미였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외형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는 박정희처럼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도 있었지만, 머릿수를 채우거나 더 많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공무원들이 강제로 가입시킨 사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이 30만 명이 넘었다는 진술도 존재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보았다.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은 소집·구금되었고, 구금된 사람들은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자 집단살해 되었다. 살해 규모는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그 수를 더했다. 이렇게 집단 학살당한 사망자는 10만에서 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CIC(육군본부 정보국), 헌병, 경찰, 우익단체 등 국가의 지시 아래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승만 이후 1990년대까지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가족과 친인척을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했으며, 연좌제를 적용해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 역대 정부는 이를 모두 부인하거나 묵인해 왔으며,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서야 진상규명과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졌다.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에 의해 해체되었듯이, 제주 4·3 사건 등의 진실규명도 역대 정부는 모두 덮어버렸고, 들추려 하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 또한 문민정부 때 1996년에 제작된 조성봉 감독의 ‘레드 헌터’라는 다큐멘터리를 교내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공안 당국에 의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제작한 조성봉 감독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처음으로 사과한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그가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민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밝힌 정부의 공식 사과문을 읽어보자.

“존경하는 도민과 유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중 하나인 4·3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저는 이번 제주 방문 전 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각계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 사업에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 왔습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 기점으로 해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습니다.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부는 4·3 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過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4·3 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와 나아가서 동북아와 세계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 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민과의 오찬 간담회 사과문노무현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의 공식 사과문을 읽어 내려가자 듣고 있던 유족이 55년 가슴에 묻어 둔 한을 터뜨리는 장면이 TV 화면을 통해 중계되었다. 그것은 치유의 통곡이고 눈물이었다.           


X세대는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태어나 아직도 반공이 민주시민의 최고의 가치인 양 말하고, 반공을 찬성하면 애국자이고, 그러지 않으면 빨갱이인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X세대는 다양한 사상을 만나고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 국가는 태어날 때부터 갖은 방법으로 반공을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시켰고, 그것에 반하는 생각이나 말을 하는 것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었다. 또한, 혹여라도 불순한 생각을 머릿속에 지니게 되지 않을까 국가에 의해 항상 감시를 당해야 했다. 


나와 관련된 X세대가 겪었을 만한 에피소드 몇 개만 이야기해 보자.

초등학교 시절 매번 해야 했던 반공글짓기,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표어 짓기, 반공 웅변대회 등은 또 어떤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할지 미래의 X세대에게 매번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자 되지도 않는 반공표어는 전국의 어린이가 매번 어떻게 다른 표어를 지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아리랑』이 일정한 터울을 두고 출간이 되었다. 군대 가기 전 1권만 출간이 되어, 1권만 읽은 채 입대했다. 우리 부대는 상병이 되어야 책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일 년 넘게 글을 한자도 못 읽는다는 것은, 정신에 가하는 얼차려 같은 것이었다. 책을 읽을 권한이 주어짐과 동시에 집에 편지해 『아리랑』 2·3권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보냈다는 책은 끝내 내 손에 닿지 않고 행방불명되었다. 왜 행방불명되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갔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뉴스만 보고 있으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길래, 가족과 함께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광화문역 출구 쪽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는 연세 있는 어른들이 모여 앉아 손바닥 크기의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세월호 행사가 끝나고 노란 리본 하나씩 달고 광화문역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한 어르신이 외쳤다. 

 “야이, 빨갱이 새끼들”

두 살배기 아들을 포함해서 우리 가족은 빨갱이였다. 적어도 그 어르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듣는 순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X세대는 전쟁을 겪지 않았고, 전쟁의 참상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픔을 알지 못한다. 그분들의 심정도 이해 주어야 하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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