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20년 넘은 티셔츠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정작 나는 어떤가 하고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저를 묘사하자면, 아마존에서 두 개에 $8.99에 산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고, 유행 지난 스크런치로 머리를 대충 묶고, 남편이 뉴로사이언스 학회에서 얻어 온 잿빛 뇌가 그려진 티셔츠(빅뱅 이론의 셸든이 입을 법한 것)에 허리춤에 줄이 한쪽만 길게 빠진 반바지를 입고, 앞 코가 헐어 천이 벗겨진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책상 앞에 앉아있습니다. 옆에는 오늘 아침에 쓴 모닝 페이지가 펼쳐져 있는데 $1 남짓한 대학 노트에 설문 조사를 하고 받아 온 볼펜으로 쓰였네요. 그리고 시애틀 1호점 스타벅스에서 산 머그잔은 애틀랜타 코카콜라 뮤지엄에서 산 70년대풍의 광고 일러스트가 그려진 철제 트레이 위에 조화롭지 못하게 놓여 있습니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요. 반성합니다.
변명하자면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고 미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심해진 것 같습니다.
어느 육아서에서는 '아이를 손님 대하듯 하라'라고 했는데 때로 '나'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손님은 방문했다가 떠나기라도 하지, 나는 붙박이처럼 옆에 있으니 주인이나 사장님 모시듯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운영하는 최고경영자 'CEO'니까요.
우리는 사장님께 어떻게 하나요? 알아서 센스 있게 모셔야지요.
매일 아침 그날의 할 일을 브리핑해 드립니다. 늘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건강하게 먹이고, 운동도 시켜서 체력을 길러드려야죠. 안타까운 부분은 하기 싫은 일, 티 안 나는 일도 사장님이 직접 하셔야 해서 이때는 응원을 열심히 해드려야 합니다. 중간중간 Refreshments도 준비해 드리고, 시간 내 완료가 어려운 일은 어떻게든 빈 곳을 찾아 스케줄 조정을 해드립니다. 안 그러면 온갖 짜증과 불호령을 감내해야 하는 건 저니까요.
그렇게 잘 짜인 하루를 마치시면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깔끔한 침구와 잠옷을 마련해 드립니다. 숙면은 다음 날의 기분 좋은 사장님으로 이어지고 그럼 저는 좀 더 편히 하루를 보낼 수 있겠지요.
'나'의 타자화를 통해 매번 후순위로 밀렸던 '나'를 곁으로 불러들이고 아껴줍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