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 1-2, 내년에 갈 거 같아요.

나에게만 반짝이는 별

by 라텔씨

"내년에 갈 거 같아요."

"......그렇구나."

"잘 지내죠?"

"그럼, 잘 지내지."

"저..그럼 남자친구가 기다려서요."

"그래..안녕."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잘 못해서 그럴 때면 존댓말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 호주에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과연 내년에는 호주를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호주는 참 좋은 곳이다. 다른 이유보다도 한국과 시차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부모님, 친구와 전화통화를 할 때 상대방의 시간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과 호주의 하늘은 같은 하늘이었다. 한국의 낮은 호주의 낮이었고, 호주의 밤은 한국의 밤이었다. 바라보는 별만큼은 다를지라도 태양과 달은 같은 시간, 같은 하늘에 떠 있었다.


그럼에도 시드니 생활 중 그녀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계약연애 끝."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기 전, 흘리던 눈물을 멈추고 그녀가 속삭였던 마지막 멘트.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 연애를 시작할 때 그녀가 했던 농담 같던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남자친구가 군대에 갈 때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연인들. 나도 그랬고, 여자친구를 두고 군대에 가는 친구도 그랬고, 애인을 군대에 보낸 여사친들도 그랬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일시적 일지, 영원할지 모르는 이별의 상황에 그녀들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군대를 가는 거였으면 그녀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지, 그녀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계약연애라는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속 설정을 현실로 끌고 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싸이월드에 나의 흔적은 없었다. 비밀 연애였기 때문에 사진은커녕 어떤 이야기조차 담기지 않았다. 그토록 애절했던 우리의 시간은 어떠한 기록으로도 남겨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그녀의 기록 속에 없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외면하기 좋은 존재였다. 이어폰 한쪽씩 끼고 함께 듣던 노래, 그녀가 내게만 했던 달콤한 말들이 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 사이의 시간과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싸이월드에 나라는 존재는 없듯, 나의 삶에서도 그녀는 지워지게 될까? 그녀가 바라는 것이 진정 이런 것일까.


아무런 답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품은 채, 나는 시드니에서의 삶을 이어갔다.


지구 남반구와 북반구의 긴 거리를 잇느라 볼륨을 잃어, 작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화기 너머 느껴지는 그녀의 긴장한 목소리. 다소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밝게 '존댓말'을 건네는 그녀. 일부러 '남자친구가요'라고 말하는 어색한 거짓말. 이어서 말하는 '내년에 호주에 갈 거 같아요.'라는 말은, 나보고 호주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오빠는 올해 돌아올 텐데, 나는 내년에 갈 거니까, 우리는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거예요.'라는 말이었을까?


이 통화 이전의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시드니에서 열심히 생활비를 벌며,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게 흘러간 지난 6개월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를 위한 시간을 살자는 마음으로 농장에 가기로 했다. 농장에서 3개월 일하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1년 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지난 6개월처럼 지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게 뻔했다.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통화 이후 그녀를 향한 마음이 정리된 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통화 속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당황하면 아무 말이나 막 뱉어내는 철부지가 6개월 만에 달라질 리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너, 아직 여자친구 기다리는 거야?"

"아니, 기다리는 건 아닌데.."

"근데 왜 그렇게 보여?"


농장에서 함께 생활하던 그가 물었다. 마트에서 뜬금없이 치즈케이크를 사는 내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랬다.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랬다. 나는 정말 기다리는 건 아니었는데.. 그랬다. 그냥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가 호주에 온다고 했지만,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녀가 정말 오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걸까?


noah guenard.jpg 출처_핀터레스트


룸메이트들에게 치즈케이크를 주고 나와서는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떠 있는 별들은 선명했지만, 서울에서 보던 하늘과는 달랐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에 있지만, 나는 그녀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별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와의 추억은 나만 볼 수 있는 하늘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9화그녀 5, 그녀와의 행복했던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