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호주에서 일한 거 세금 환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살아있었다.
그녀의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문자가 무성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은 자연스럽게 핸드폰 타자를 치고 있었다.
'옛날에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죽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라며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던 나였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문자에도 아무런 두근거림이 없었다. 마치 아는 동생이 연락한 것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궁금하다는 걸 알려주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내 마음의 정리는 확실했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자고 다짐했던 나의 마음은, 2년 동안이나 호주에 나를 홀로 내버려 두고, 내가 한국에 왔을 때 즈음 호주로 떠났던 그녀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꿈에 그리던, 아니, 꿈에 그렸던 그녀를 만나는 약속을 잡으면서도 아무런 미소를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내 마음과 어울리지 않게 눈부신 여름 한낮, 방학이라 인적이 드문 학교 근처의 2층 카페에 앉았다. 출입문을 등지고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카페에는 나뿐이었고, 조용한 피아노 선율을 뚫고 '일행 오시죠?'라는 사장님의 말과 그렇다는 나의 눈빛이 오갔다. 그녀가 오면 인사를 어떻게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생각을 해봐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유리문에 달린 종이 '띠링' 울리며 누군가 들어왔음을 알렸고, 등지고 앉아있던 나를 망설임 없이 지나쳐 내 앞에 앉았다. 그녀였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와 하얀 얼굴, 그리고 다시 검은색의 민소매 원피스로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더워서 볼이 발그레해진 것이라고 어필하듯 손을 부채처럼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지 못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안녕하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응, 잘 지냈어?'라고 답했다.
"세금 환급 어떻게 신청해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그녀의 질문. 하지만 그녀는 실수를 해버렸다. 우리 둘 뿐인 공간을 가르며 내뱉은 그녀의 한마디에서 '나는 이게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존재했다. 죽었다고 믿기로 했었던 거짓말을 잘 못하는 그녀는 죽지 않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하고 몇 달 전에 내가 했던 세금 환급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설명할 것도 거의 없었다. 어디 사이트에서 신청하면 되는지, 얼마나 걸렸는지, 난 얼마만큼의 금액이 환급되었는지 등등, 내가 아는 전부를 알려줘도 5분이 채 안 걸렸다.
"왜 호주에 안 왔어?"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무의식 속에 꾹꾹 눌러 담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 한 문장.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갖 상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그녀가 호주에 오지 않은 이유, 또는 오지 못 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남자친구가 생겨서 그랬던 건지..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는 기회였다. 무슨 대답을 들게 될까 긴장하고 있는 찰나, 돌아온 답은 두리뭉실하고 애매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
'후우..'
여전히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대답에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를 만나고 한 번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던 나는 입에 힘주어 굳게 다물었다. 대답을 강요해서 내 궁금증을 기어코 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침내 이 공간은 내가 있을 필요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도 당황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당황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주머니에서 딥블루 컬러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전했다. 눈앞에 나타난 손수건을 보며,
"아 뭐예요, 손수건. 아저씨 다 됐네."
라고 말하는 그녀의 멘트에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전 남자친구 앞에서 뜬금없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런 멘트를 날리다니.. 뭐 때문에 눈물이 난 건지 몰라서 혼란스러웠지만, 본능적으로 터진 웃음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그 웃음의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오빠, 동생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호주에서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호주에 있었던 시간이 나에게, 그리고 그녀에게도 아픈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았다는 것을.. 그녀도 그런 마음이었던 걸까? 오래전 연애할 때 함께 알고 지냈던 친구 이야기, 지인 근황 등으로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이 채워졌다.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친한 오빠 동생처럼 편한 대화였다.
그녀와 편한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내 눈앞에 존재하지만, 정말로 내가 사랑했던 그때의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 그녀를 보고,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꼈던 설렘의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음에,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의' '감정'이 죽은 것임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던 몇 년 전의 내 다짐과 확신은 어느새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만 남아버렸다. 내 감정의 조각들은 느리지만 분명히 빠져나가는 모래시계 속 모래와 먼지처럼 모두 흘러내려 남은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 떨듯이 재잘거리며 해맑은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녀도 애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전 남자친구라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노력 중이었다. 어쩌면 내가 인정했던 이별의 순간을 지금에서야 경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귀자'라는 말도 없이 시작했던 우리의 인연은 '헤어지자'라는 말도 없이 끝났다. 시간의 흐름은 끝났다는 사실조차도 흐릿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를까 다시 들춰보는 인연의 끝은 메마른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시간이었다.
점점 대화 사이의 어색한 간격이 길어지며, 이제는 일어나야 할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일어날까?'
이 한 마디면 그녀와 나 사이의 모든 인연이 끝난다.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남아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아쉬움이 우리 사이를 반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엇갈릴 대로 엇갈리고, 식을 만큼 식어버린 감정의 주인공들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이제.. 일어날까?"
"어느 쪽으로 가?"
"전 이쪽이요."
"그래.. 잘 가."
"네.."
그녀의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왜일까.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다시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뭔지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꿈쩍도 안 하던 심장이 그녀가 멀어질수록 요동쳤고,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담배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코 끝이 찡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무엇 때문에 심장이 뛰고, 왜 눈물이 나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고 내 안에 남아있던 무언가가 계속 외치고 있었다. 사랑? 아쉬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름 모를 감정이 내 안에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손에 쥔 담배를 꾸겨버리고 발걸음을 빠르게 뗐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경쾌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 걸었다. 우리의 시간이 끝났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방에 넣은 그의 손수건을 보며 생각했다. 세탁해서 다음에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일 거다.
그여야만 한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내 씩 웃었다.
내 뺨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내 눈은 웃고 있었다.
"아.. 이러려고 손수건 갖고 다녔어요?"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웃고 울고 있었다.
_the END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