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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 5. 표류하던 이별이 도착했다.

by 라텔씨

호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거의 3년 만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와의 자유로운 연애를 위해 호주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의미는 희석되었다. 지금에서야 호주에 온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년 전, 내 나이가 어리다고 호주에 가지 못하게 했던 아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마음먹었던 것을 실행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에서 보자고 했던 그와의 약속은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간혹 그가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많이 정리되었다. 그때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시드니의 생활은 재미있었다. 친구와 함께 뻔한 유학원을 통해 등록한 한국인이 가득한 어학원에서, 각자의 뻔한 이유로 호주에 온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노는 일상이었다. 영어가 전공이었던 나는 카페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오전에는 학원을 가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이 끝나면 시드니를 구경하고. 대부분의 유학생들, 워킹홀리데이 온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시드니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차이나타운 근처와 달링하버 근처의 아파트들.


그곳들을 지나다 보면, 그의 싸이월드 사진첩에서 봤던 적 있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여기 있었구나. 그때 그는 여기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 내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가 호주에 처음 온 1년 동안은 싸이월드에 자주 일상 사진을 올렸었다. 나는 아무 댓글을 남길 수 없었지만 이따금씩 그의 일상을 보곤 했다. 그가 어디에 갔었는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무의식이 나를 그에게 안내했다. 어쩌면 그 혼자 호주에 가도록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이 안내한 것일지도 모른다.


달링 하버에 스타벅스가 하나 있었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주 가던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는 순간, 사진 하나가 생각났다. 그리고 눈물이 주룩 흘렀다.


내 생일날, 그가 축하해 준 사진 속 지구 반대편의 위치가 이곳이었다. 그 사진 속에는 작은 조각케이크에 촛불까지 꽂혀있었고, 달링 하버 스타벅스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 속 설명에는 '뜬금없는 케이크'라고 적어놓았었지만, 나는 그 사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때.. 만약 그때 내가 함께 있었다면.. 그와 함께 이곳에서 생일을 축하하고, 사랑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아주 잠깐 이런 생각에 머물렀지만,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호주에 없고,

나도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있을 리 없었다.

내 마음속의 그도 추억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추억이 지금의 내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짧게 타올랐던 그 시절의 열기는 더 이상 온도로 남지 않았다. 그저 존재했었음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2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식어버린 공기와 같았다.




호주에서의 생활은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렘과 즐거움과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어야 할지 동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일한 거 세금 환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호주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쳤다. 2년 반 만에 연락하는 문자가, 안부 문자도 아니고, 세금 환급 어떻게 받냐는 문자라니.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히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겠지?


'문자로 설명하긴 긴데.. 한 번 만날까?'


그도 이상한 사람이다. 이런 어이없는 문자에 이렇게 쿨하게 보자고 한다고?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안 했던 전 여자친구가 황당한 멘트로 연락을 해오는데, 이렇게 쉽게 답장한다고?

그에게 문자를 보낼 때도, 그에게서 답장이 왔을 때도 떨리거나 설레는 감정은 없었다. 아주 오랜 친구에게 연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 이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 둘 사이에 잘못된 이유로 이별을 한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멀어져 간 인연만이 가질 수 있는 혜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예전에 놀이터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을 때 내 옆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것처럼,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금 환급 어떻게 신청해요?"


대화를 시작하기에 아주 적당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이 만남의 표면적인 목적이었으니까. 그는 어떻게 신청하는지 술술 설명해 줬다. 정말 밸도 없지. 그걸 내가 몰라서 보자고 했겠어? 대충 알아들었다.


"왜 호주에 안 왔어?"

"....."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다. 이 대답이 그와 나의 이별의 이유, 이별의 답이 될테니까.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고,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아빠가 더 크면 가라고 해서요.'라고 어렸던 나를 변명하는 것 같아서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어떡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


이번엔 그가 입을 닫았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내가 그에게 뭘 하고 있는 거지?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괜찮아졌을 거라는 생각은 나의 오만함이었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변하는 그의 표정과 그가 삼키고 있는 수많은 말들이 전해졌다. 그를 직접 마주하며 그의 주변을 감싸는 공기를 느끼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가 나에게 느끼는 배신감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 것만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어? 왜 이러지?"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아 뭐예요, 손수건이라니. 아저씨 다 됐네."


내가 정말 미쳤나 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그에게 또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친다. 이런 나를 정신 나간 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푸하하, 너답다 진짜."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표정은 한결 풀린 듯 보였다.


"아유, 너 진짜 누가 데려갈지 그 사람은 큰일 났다."

"내가 왜요. 나 데려가면 대박 행운이지."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오랜만에 만난 오빠 동생처럼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X (1).jpg 출처_핀터레스트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터져버렸던 그 눈물. 그건 지난 2년 6개월의 시간 동안 파도에 떠밀려 먼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별'을 이제야 마주하고 비로소 현실이 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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