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가려고.."
몇 달 만에 연락한 그에게 대뜸 전한 말은 '보고 싶었어.', '잘 지냈어?'도 아닌 '나 호주 갈 거야.'라는 말이었다.
그와 그만 연락하기로 마음먹은 후 매일 퉁퉁 부은 눈을 가리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다녔다.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는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가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기댈 수 있는 친구였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를 좋아하기 전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고, 그가 술집에서 몰래 계산을 해주고 간 그날도 함께였던 친구.. 그에게 문자가 왔을 때,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문자를 잘 이어가라고 말해 준 것도 그녀였고,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먼저 확신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곧 있으면 제대하는 군인 오빠 남자친구가 있었다. 고무신 경력을 이겨낸 연애 경험 만렙의 베테랑이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곰돌이 푸우를 닮았었는데, 적당히 다부진 체격에 하얀 피부가 군인 특유의 머리 길이가 아니면 군인인지 아닌지 헷갈렸을 거다. 휴가를 나온 첫날에는 친구에게 점심을 사준다고 와서 함께 만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남자친구가 군인인 그녀가 부러웠다. 적어도 가족이 반대하지는 않았고, 군인은 제대라는 걸 하니까 말이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가는 건 어때?"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응. 나는 내년에 오빠 전역하면 같이 갈까 생각 중이거든.
거기 가면 가족 반대도 없을 거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영어 공부도 하고,
오페라 하우스도 보고,
해변에 근육질의 금발 백인들도 감상하고,
서핑도 하고,
연. 애. 도. 하고!"
눈이 커졌고, 상상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가려고.'라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그에게 답장이 왔다. 몇 달 만인데도 그는 여전히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언제 가려고?'
'내년 1학기'
'알았어'
짧은 문자 속 대화가 끝나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달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 앞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당황했을 법도 한데 정말로 갈 거냐는 것을 확인하는 듯 물었다.
"정말 갈 거야?"
"응"
"알았어. 그럼 나도 준비할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남자친구가 아빠를 만나러 불쑥 찾아오는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언제 겪었냐는 듯, 우리 집은 예전과 같았다. 나는 아빠도, 언니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들도 더 이상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순조롭게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 돈으로 호주행 비행기 티켓도 끊고, 호주에서 자리 잡는 데 쓸 생각이었다.
"아빠, 나 호주 워킹홀리데이 가면 안돼?"
"그게 뭔데?"
"호주에서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하는 거야, working & holyday."
"얼마동안?"
"1년?"
"안돼."
말도 안 돼. 아빠가 나를 아끼는 마음에 쉽게 허락을 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었지만, 내 의견을 전혀 듣지 않고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아니 무슨 시드니가 위험해~~ 이 동네 골목이 더 위험하겠지."
"안돼, 넌 아직 애야."
"나도 성인이라고."
"혼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성인이라고 다 똑같은 성인인 줄 알아?
정 가고 싶으면 25살 넘어서 가."
'넌 아직 애야.', '우리 애기'
아빠에게 22살 막내딸은 여전히 애기였다. '우리 애기'라고 부를 때면, 내 부탁은 뭐든 들어주는 모드이고, '넌 아직 애야.'라고 말할 때는, 어떤 이유로도 아빠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성인을 규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빠는 법을 멋대로 재단하는 무법자였다. 아빠의 기준에 22살의 막내딸은 여전히 청소년이고, 애기였다. 25살 정도는 돼야 성인이라는 아빠만의 고집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절대로 아빠를 이길 수 없었다.
'어떡하지?'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때 즈음,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비행기 표 끊었어.'
그는 나를 원하는 마음을 반영하듯 엄청난 추진력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의 마음이 변함없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나의 마음도 같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그의 출국 날짜가 2개월 정도 남은 그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나의 마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고, 그 역시 그랬다. 하지만 내가 호주를 가겠다는 말 때문에 복학한 지 1년 만에 불쑥 호주를 가기로 결정한 그에게 호주에 언제 가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에게 언제 호주에 갈 거냐고 묻지 않았다. 아마 1년 내로 어느 시점에는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호주에 가기 전까지의 2개월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간 미뤄왔던 감정을 온 힘을 다해 표현했다. 매일 만나 달콤함을 속삭였고, 사랑을 나눴다. 22년의 인생 속 가장 찬란하게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2개월이 지나면 정말 오랫동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만 알기로 했다.
"오빠, 2개월 지나면 끝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2개월 지나면 나한테 더 빠져서 절대 못 헤어 나올걸? 아마 호주로 바로 날아오고 싶어질걸?"
2개월이 지나고 그의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나는 그에게 완벽하게 스며들었지만, 아빠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호주로 날아갈 용기는 낼 수 없었다.
그가 호주로 떠난 후 다시 2개월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2개월 전과 다른 건 내 마음 한 구석에 그에 대한 공허함 뿐이었다. 이 공허함은 그의 빈자리가 생겨서이기도 하지만, 그를 만나러 호주에 갈 수 없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아빠 말대로 어른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법적으로는 성인이라지만, 스스로 어떤 용기도 낼 수 없는, 작은 반항은 하지만 결국 아빠의 그늘에 머물고 싶은 아이였다.
아빠의 그늘 아래, 아르바이트, 편입 공부, 취직 등 내 주변에 놓인 모든 것들이 호주를 갈 수 없는 핑계고 이유가 되었다.
몇 달에 한 번 발신자 표시 없이 걸려온 전화, 본능적으로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 말이 없지만 전해지는 그의 마음에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호주 언제 와?'라고 입을 뗀 그의 질문에 '내년에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이 나오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그렇게 간절했던 그였는데, 지구의 남쪽과 북쪽,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그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나 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인연인가 보다.
'이렇게 될 운명'이라는 말로 내 마음을 정리했다. 힘들지 않게,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나를 보호했다. 그가 호주로 떠나는 날, 나도 모르게 공항에서 내뱉은 '계약 연애 끝'이라는 말은 이미 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내 마음의 작은 외침이었던 걸까. 한 순간에 받아들이게 된 이별은 나의 일상을 흔들지도 않았다.
사랑의 시작이 설렘이라면 사랑의 끝인 이별은 아픔이 존재해야 한다. 뜨겁게 달궈졌던 사랑이라는 돌에, 이별이라는 찬물을 끼얹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고 깨지거나 해야 할 텐데, 내 감정의 돌은 오히려 고요했다. 이별의 슬픔을 온전히 안으로 삼켜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그가 호주로 떠난 지 2년이 다 되어서야 호주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