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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 2.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by 라텔씨

언니가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야, 너 미쳤어?"


미간을 구긴 채 버럭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언니를 보며, 난 멋쩍게 웃었다. 아마 자기 친구와 내가 연락하는 것을 눈치챘고, 서로 관심 있어하니까 계속 연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는 최대한 별 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왜~~~"

라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니는 그런 나의 얼굴과는 대조되는 표정을 유지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간 정적 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돌아서더니,


"아빠, 얘 남자 생겼어. 근데 걔 완전 바람둥이야. 얘 어떡해?"

라며 식탁에서 이제 막 저녁을 드시는 중인 아빠에게 말했다.


"아, 뭔 소리야~~ 남자 친구 아니야~~ 갑자기 이상하게 왜 급발진이야?"


"무슨 말이야 그게? 바람둥이라니?"

나를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대하는 아빠가 내 방 입구에 서 있었다.


"아니 무슨 바람둥이야, 언니는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왜 몰라, 내가 걔를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알았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고등학교 친구야, 내가 잘 아는 애야."


언니는 아빠 앞에서 자기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하는 중이라고 강조하려는 듯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내 말들을 잘라냈다.


갑자기 일어난 이 황당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답답함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본 아빠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애랑 연락하지 마. 언니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네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거야. 언니가 너 잘 못 되라고 이럴 리 없잖아. 그 남자랑 계속 연락하면 핸드폰 압수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언니가 그를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도 듣지 못했고, 납득 할 수도 없었다. 나보다 더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의 단호한 명령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울컥 삐져나오는 울음을 눌렀다. 그렇게 터지지 못한 울음은 계속해서 눈물로 흘러내렸다. 눈물의 형태를 한 울음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빠.. 뭐 하고 있어?'

'과제하고 있었어, 너는? ^^'

'오빠....'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오빠라는 단어만 반복했다. 몇 시간 만에 온 문자가 앞선 문자와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는지 바로 전화가 울렸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오빠.. 아빠가 오빠 만나지 말래."

"....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 언니가 막 오빠 바람둥이라고..."

".... 잠깐 만나, 집 근처 놀이터로 갈게."

"아니.. 안돼.. 못 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잠깐이면 돼.'라는 문자..


나는 퉁퉁 부은 눈을 가리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야구 모자로 얼굴을 누른 채 나왔다.


"너 이 시간에 어디가?"

"답답해서 바람 쐬러."


몇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울었단 걸 아는지, 아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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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5분 거리에 한적한 놀이터가 있었다. 작은 놀이터라 밤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 벤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왜' 였을까.. 아니, '어떻게' 였을까?

고개를 살짝 들어 눌러쓴 모자 밑으로 그를 바라봤을 때, 몇 시간 동안 울었다는 사실을 모두 잊을 정도로 미소가 번졌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잡아 내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전화 통화에서의 심각하고 단호한 말투는 사라지고, 다정한 그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한 공간에 단 둘만 있는 그와 나의 첫 번째 시간.


"오지 말라니까, 왜 오고 그래요. 이 오빠 안 되겠네~~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어떻게 안 오냐? 너 운 거 다 아는데... "


퉁퉁 부은 눈을 가리려 쓴 뿔테 안경 때문에 고개를 들기 창피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말없이 내 옆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봐요. 보지 마요."

"예뻐서."

"아 뭐래, 예쁜 거 이제 알았나?"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내가 미쳤던지 아니면 이미 그가 많이 편하고 좋았던 것 같다.

놀이터에서의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아빠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좋아한다, 사귀자. 이런 말은 없었다. 나는, 그리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문자로, 전화 통화만으로도 어렴풋이 느껴지던 그 감정은, 두 눈으로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는 공간에서 확신으로 번졌다.


포옹, 키스, 심지어 손 끝이 닿은 적도 없었던 그곳에는 우리를 감싸는 무언가 있었다. 그 공간 안에서 그와 나는 완벽히 하나였다. 나의 빠른 심장 박동만큼 그의 심장 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세상과 단절된 이 공간에 그와 나 둘 뿐이었다.


놀이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이어지는 기다란 골목길 끝에서,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그를 몇 번이고 뒤돌아 보며 걸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문자를 남기고..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그렇게 그 날, 외부의 충격은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주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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