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0. 번지 점프를 하다. 두 번.

by 라텔씨

이병헌, 고 이은주 주연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병헌과 이은주가 환생한 인물 둘이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린다. 젊은 날, 당시의 나에겐 여주가 환생해 남학생으로 나타나고, 전생의 기억을 찾아낸 후 함께 뛰어내리는 결말이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왠지 사랑이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 그 번지점프대는 뉴질랜드 남섬의 카와루 번지점프였다. 번지점프를 해볼 기회가 없던 나는 그녀와 뉴질랜드의 이곳에서 뛸 수 있다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뉴질랜드 여행은 그녀가 호주에 갈 거라고 말해서 내가 '그래? 그럼 나도 가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뉴질랜드의 퀸스타운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와카티푸' 호수를 옆에 끼고 있어서 어디를 가도 호수와 푸른 잔디와 벤치와 나무가 어우러졌다. 걷다가 쉬다가 다시 걷다가 담배를 피우며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람이 별로 없는 차분한 분위기의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퀸스타운에서 즐길 액티비티가 많아서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급하게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느긋하게 담배를 태울 때마다 혼자 여행이라는 쓸쓸함의 문을 열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불쑥 들어왔다. 이제 너무나 익숙해진 상황이라 그럴 때면,

'뭐.. 어쩌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마음을 먹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지만, 담배 연기를 내뿜는 한숨의 깊이는 점점 옅어졌다. 처음 담배를 필 때는 기침이 나고 숨을 못 쉴 거 같았던 담배 연기가,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폐를 오가는 것처럼, 그녀와 나 사이의 답답함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졌다.


혼자 하는 여행에는 대화가 없다. 대화가 없으니 뇌가 자유롭다. 뇌가 자유로우면 오만가지 생각이 드나든다. 오만가지 생각 중에 만가지 정도는 그녀와의 추억에 대한 생각이고, 다시 만가지 정도는 그녀와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었다. 추억 안에서는 그녀를 생각하며 피식거렸고, '그녀가 호주에 오는 걸 보고 올 걸'하는 씁쓸한 후회를 반복했다. 미래에 대한 상상은 결국 그녀를 보게 될 것이라는 느낌과 '다시 그녀를 본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그녀가 과거의 그녀와 같을까?'라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과거의 그녀는 이미 현실 속에서 죽어 사라진 존재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간을 지나, 번지점프를 하는 곳에 도착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인공들이 함께 뛰어내리는 마지막 장면의 그 다리.


눈앞에 펼쳐진 다리가 영화 속 장면보다 아담하게 느껴져서 '여기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번지점프여서 적잖이 긴장한 상태였다. 스카이 다이빙도 해봤으면서 번지점프를 왜 두려워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스카이 다이빙은 뛰어내릴 때 땅이 너무나 멀고, 구름에 가려 있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번지 점프는 세차게 흐르는 계곡 물과 바위들이 현실로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카이 다이빙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뒤의 전문가가 뛰면 따라 떨어졌지만, 번지 점프는 오롯이 나의 의지만으로 뛰어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스카이 다이빙은 잘못되면 바로 죽지만, 번지 점프는 잘못되면 큰 부상을 입고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위험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더 걱정할 게 많았다.


번지점프를 뛰는 곳에 도착해서 다른 사람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번지 점프대 위에는 사람들의 모든 표정이 있었다. 신나서 춤을 추는 사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지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리는 사람. 뛰려고 준비를 다 마치고, 뒤에서 세어주는 카운트 'three, two, one'에 맞춰 주저앉는 사람,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오는 사람, 그런 모습을 옆에서 깔깔 거리며 보다가 본인도 점프대에 올라갔다가 그냥 도망 나온 사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영상으로 남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점프대에 섰다. 대부분 로프를 몸통에 걸었는데, 나는 발목에 걸어달라고 했다. 발목에서 쑥 빠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은 사라질 정도로 묵직한 무언가가 발목과 종아리를 꽉 움켜잡았다. 아프지 않지만 아주 넓은 수갑 같았다. 대 빠질 일은 없겠구나 안심이 됐다.


"이름이 뭐야?"

"알렉스"

"누구랑 왔어?"

"여자친구랑 왔어."

"여자친구한테 인사해~"

(구경하는 사람 쪽으로 대충 손을 흔든다.)

"준비 됐어?"

"응."

"쓰리, 투, 원."

"잠깐! 카운트가 너무 빠르잖아."

"알았어, 그럼 다시 셀게, 쓰으리~~ 투우~~ 원! 번지!"

"번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크게 뛰었다. 내 몸은 잠깐의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곧 수직낙하했고, 용수철처럼 다시 튀어 올랐다. 놀이기구에서 떨어질 때 배에 힘을 꽉 주게 되듯이, 떨어질 때는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튀어 오를 때는 느슨해졌다를 반복했다. 강렬한 첫 낙하의 기분은 꽤 오래도록 나를 흥분상태에 머물게 했다. 위아래로 출렁이면서 환호성을 계곡 질렀고, 소리 지르기 민망해질 정도로 출렁임이 멈출 때까지 흥분은 계속 됐다.


"One more time."


계곡 옆 계단을 올라와 다시 점프대 근처에서 대기했다. 흥분이 사라지기 전에 이어서 다시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앞서 준비 중이었던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몇 분 만에 내 차례가 되었다.


첫 경험의 강렬했던 느낌을 기대하며 점프대에 섰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그러나 두 번째는 처음의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때의 기분은 훗날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의 기분과 같았다.

keyword
이전 22화그 0. 오빠, 담배 한 번 피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