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호주 가요.."
진짜 드라마 속에나 나올 법한 계약 연애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진짜 '계약 연애'였다. 약속했던 시간이 끝나고, 나는 호주에, 그녀는 한국에 머물렀다. 지금처럼 카톡이나 DM이 있어서 쉽게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거짓말을 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런 그녀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싸이월드'에 접속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 역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던 시기의 싸이월드는 우리의 비밀 메신저였다. 함께 갔던 곳, 함께 속삭였던 문장들이 그녀의 다이어리에 남는 날이면 나는 환희에 찬 슬픔을 맞이했다. 토막토막 나열된 단어들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그리움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이별을 실천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다.
그녀는 다이어리에 추억의 단어만 남겼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어떤 의미도 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글에 감히 어떤 표현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 연애를 했었고, 거짓말을 할 때면 양 볼이 빨개져 누가 봐도 거짓말인게 들통나던 그녀는 우리 사이만큼은 지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나와의 관계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었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홈피에 아무런 흔적을 남길 수 없었다.
그랬던 그녀에게서 쪽지가 와 있었다.
"오빠, 나 호주 가요."
이 쪽지가 온 날짜를 확인해보니 내가 농장에서 한창 토마토를 따고 있을 시기였다. 스카이 다이빙을 한 지금 시점으로부터 2개월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한 달 전이었다. 이게 무슨 장난 같은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그녀의 쪽지는 이 한 문장이 전부였다. 언제, 어느 도시로 얼마동안 호주에 온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카이 다이빙 영상 촬영에 그녀의 이니셜을 촬영하고 몇 시간이 되지 않아 그녀의 쪽지를 보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분 전에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그녀가 살고 있는 지구에 안착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거의 2년 만에 온 그녀의 쪽지를 읽고 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어떤 답변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Hey~Alex, this is for you."
나와 함께 하늘에서 뛰어내린 스카이 다이빙 전문가는 작은 쇼핑백에 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담은 CD를 건네 주었다. 그렇게 케언즈에서의 나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며칠간 머물렀던 도시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내 머릿속은 그녀로부터 온 쪽지의 한 문장으로 가득 찼다. 그녀가 거의 2년 만에 나에게 그런 쪽지를 보낸 이유가 뭘까. 그녀가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우연히 호주에서 만나면 당황할까 봐 미리 알려주는 건가? 나는 믿은 적 없지만, 그녀가 말했던 한국에서의 남자친구와 헤어진 건가?
아무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그녀의 짧은 한 문장은 온갖 상상의 재료를 던졌다. 그리고 그 재료들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사라져가고 있다고 믿었던 작은 불씨를 다시 살려내기 시작했다. 2개월 전에 온 쪽지였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 동안 나는 그녀 마음속에 존재했었고,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비로소 나를 불러 세운 것이라는 점이었다.
'오빠'로 시작한 문장을 본 나는 이미 그녀와 다시 사랑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2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각자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나를 떠나려던 그녀를 내 의지로 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면 된다. 한 번 해봤는데, 두 번 못할까. 자신 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장악했고, 다음 행동을 준비했다.
그녀에게 뭐라 답장을 보내야 좋을까?
"오래 걸렸네.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그렇겠지?
"그래? 언제 오는데?" 무심한 듯, 내 감정을 최대한 숨기듯 말해볼까?
"비행기 조심해." 응? 이건 말이 헛나왔다.
관광지를 떠나기 하루 전,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인터넷 카페에 앉아 전 여자친구에게 후회 없을 단 하나의 문장을 보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답장하기'를 누르고, 작은 화면에 글을 썼다 지웠다, 두 손을 놓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기도 했다. 이따금씩 모니터에 반사되는 나의 표정은 '좋으면서 좋은 걸 티 내지 않으려는 듯'한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대놓고 좋아하면, 이제야 다시 찾아온 희망의 끈이 달아날까봐 웃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준 모습.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보낸 쪽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나에게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쉽게 답장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음 달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그녀가 이제야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거라면 적어도 1년은 호주에 머물 것이고, 우리는 다시 1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고나니 들떴던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나의 온도는 그녀에게 보내는 쪽지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언제? 워킹 홀리데이로 오는 거야?"
누구에게나 물어볼 수 있고, 누구나 답할 수 있는 아무런 의미도 유추할 수 없는 인사 정도의 답장. 그렇게 보내고 카페를 나왔다.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쉽지 않겠구나.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와 나의 위치만 바뀔 뿐,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호주와 한국만큼의 거리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케언즈를 떠나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을 확인해 봤지만, 그녀에게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호주에 온 것인지, 올 예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가 여전히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쪽지만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시드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보낸 쪽지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돌아왔음을 알리는 글을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남기고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특정되는 사진을 올렸다.
그녀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녀가 서 있는 장소는 내가 시드니에서 자주 가던 카페 앞 분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