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앗, 뭐야? 왜 멘솔이야?"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 처치 공항에 나와서 담배를 입에 빼물자마자 나온 외마디.
2주의 여행 기간 동안 필 담배 한 보루를 면세점에서 샀다. 원래 피우던 담배가 마침 면세점에서 품절이었다.
"저기요, '피터&잭슨' 없어요?"
"어? 그거 품절인가 봐요. 몇 미리 찾는데요?"
"8미리요."
"그럼 이게 같은 미리수예요. 이걸로 하실래요?"
면세점 직원은 자연스럽게 타르 5mg이 적혀있는 던힐 한 보루를 추천해 줬다. 시드니에서 크라이스트 처치까지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 입국 수속을 마치는 동안 내 몸은 충분히 무기력해졌고, 니코틴을 강력하게 원했다. 공항에서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여기가 뉴질랜드구나'라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담배 생각부터 났다. 여행 동안 나의 니코틴을 든든하게 채워줄 담배 10갑이 든 상자를 뜯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마자, '아.. 망했다.'가 튀어나왔다.
나는 박하향이 나는 멘솔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멘솔이었다. 어쩐지.. 내가 아는 던힐 상자는 하얀색인데, 얘는 초록색 이더라니. 면세점 직원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나는 당연히 면세점 담배코너 직원은 담배를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를 믿어서 아무 의심 없이 주는 대로 샀을 뿐이었지만, 완전한 판단 미스였다. 그렇게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고민에 빠지게 한 것은 '담배를 새로 살까? 말까?'였다. 수중에 비싼 담배 한 보루가 있는데, 새로 사야 한다고? 새로 사면 한 갑에 8달러씩 할 텐데? 일단 멘솔이었지만 펴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독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피우긴 했었지만, 하루에 몇 개 피우지 않았고, 비교적 순한 미리 수의 담배를 피웠었다. 그런데 그녀와 사랑을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면서 내가 피우는 담배의 빈도는 잦아졌고, 농도는 높아졌다. 1mg를 피우던 나는 이별의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독한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호주에서 오랜 기간 괴로웠던 마음의 결과인지 어느새 8미리의 담배에 익숙해져 있었다.(호주의 담배가 독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 담배가 약한 것)
매일 무는 담배 하나에도 그녀 때문이라는 핑계가 담겨 있고, 그녀에 대한 집착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 했지만, 나는 굳이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 안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이 차이 꽤 나는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은 상관없다는 듯 물었다.
"오빠, 담배 한 번 피워봐요. 오빠는 담배 피우는 모습이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왠지 담배를 멋있게 피워야 할 거 같은 부담이 느껴져서, 한사코 그녀의 요청을 무시했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결국 마지못해 그녀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멋있어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괜히 긴장했고, 몸이 경직됐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이 어색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긴 장초를 발로 밟아 껐다. 아무 데나 꽁초를 틱 버리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 여자친구 앞에서 예의 바르게 불씨를 꺼뜨렸다.
"이제 됐어요, 오빠 호주 가도 담배 피우는 모습 상상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녀는 나에게 이런 엉뚱한 생각을 던지며 나를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생각하면 '가스라이팅'이라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싶다고 피워보라고 했던 담배는, 사실 그녀가 나를 기억하는 게 아닌, 내가 그녀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스위치가 되었다. 매일 열두 번도 더 스위치가 켜졌다.
뉴질랜드 남섬은 정말 아름다웠다. 호주의 자연도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이 100이라고 하면 뉴질랜드는 10000 정도 됐다. 100배 아름다웠다기보다는 100과 10000은 같은 숫자이지만, 다른 종류의 단위라고 생각할 만큼 갭이 크듯이, 호주의 아름다움과 뉴질랜드 남섬의 아름다움은 닮은 듯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뉴질랜드의 자연경관에 매료될 때마다 담배를 피우면서 아름다움을 만끽했고, 그럴 때마다 그녀가 그리웠다. 한동안 담배를 태워도 그녀가 크게 생각나지 않았는데, 뉴질랜드로 오기 얼마 전에 본 그녀의 싸이월드 쪽지가 그녀를 다시 불러들였다.
크라이스트 처치 성당을 보면서 피우는 담배 연기에서, 마운틴 쿡의 만년설을 보면서 피우는 담배에서도, 빙하 트래킹을 하다가 쉬는 곳에서 피우는 담배에서, 석양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드는 언덕들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에도, 에메랄드 빛으로 오묘한 빛을 담은 테카포 호수 앞에서 피우는 담배에서도.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는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아직 상상할 수 있을까.
다시는 오기 힘들게 분명한 이 아름다운 곳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녀가 생각났다. 담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는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고, 그녀와 이 풍경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에 사무쳤다. 그녀가 호주에 나와 함께 왔었다면, 그녀와 뉴질랜드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호주에 오기만 하면 뉴질랜드에 여행을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나는 뉴질랜드에 왔고,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2주 동안 뉴질랜드에서 혼자 워킹홀리데이를 마무리하는 축하 여행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녀의 싸이월드 쪽지는 혼자 익숙했던 나를 뒤흔들어, 여행 내내 그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담배 피우는 나의 모습을 기억하겠다는 그녀의 멘트가 내 마음속 그녀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곁에 없었지만, 결국 나는 그녀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