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 커튼 끝으로 치고 들어오는 햇살의 강도로 어림잡아 이르지 않은 아침.
어젯밤 독일 청년이 쫓아나갔던 두 스페인 여자들은 침대에서 미동도 없었다. 새벽에 잔뜩 술 취한 목소리로 왁자지껄 들어와서 불을 켜긴 했지만, 'Oops, Sorry'라고 해맑게 웃고 침대에 쓰러졌다. '매너 없는 사람들..'이라며 속으로 화를 삼킬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활은 이제 나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기에 '그러려니..'라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일찍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에 불을 켰다. 그녀들의 미간이 순간 찡그려지기는 했지만, 눈도 뜨지 않고(아니면 실눈을 떴다가 질끈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잠들어 있었다. 자다가 답답해서 벗었는지, 뒤집어진 바지가 침대 옆에 떨어져 있었고, 늘씬하고 긴 다리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있었다. 이불 반은 걷어차서 훤히 보이는 그녀의 다리와 속옷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지만, 그뿐이었다. 이건 훔쳐보는 것도 아니었고, 음흉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이는 것을 보고 있었을 뿐,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그러니 이건 범죄도 아니고, 떳떳하지 않다고 자책할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이 혼돈스러운 방을 배경으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다.
스쿠버 다이빙은 이틀 동안 총 4번의 잠수를 하는 일정이었다. 오전에 한 번, 점심 먹고 오후에 한 번, 하루에 2번씩.
스쿠버 다이빙은 시드니에 있을 때, 입문자 코스로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니고, 교육을 받고 몇 번의 다이빙을 완료하면 받을 수 있는 수료증 같은 것이다. 평생을 물을 무서워해서 제대로 수영도 배워본 적 없는 내가 스쿠버 다이빙이라니..
스쿠버 다이빙은 공기통을 매고 물속에 들어가 숨을 쉬며 내가 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한국을 떠나 호주에 와서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었고, 그 세계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게 되었듯이, 물속 세계를 알게 된 것 역시도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바닷속 2~30미터 밑에서 햇빛이 들어오다 사라지는 머리 위를 쳐다보고 있으면, 고요한 심연에 머무는 듯했다. 지상에서 죽은 모습으로만 볼 수 있는 물고기 떼의 장엄한 광경이나 바다거북, 해마, 대왕오징어, 상어 등 쉽게 만나지 못하는 생물들을 마주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아직도 친구들에게 내 주먹만 한 눈알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던 대왕오징어 얘기를 꺼낼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깊이 새겨진 것은 시계(視界)가 한정적인 바닷속에서는 어느 방향에서 어떤 위험한 생물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과 잠깐의 실수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이 주는 긴장감이었다. 다이빙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긴장감은 나의 폐에도 힘이 들어가게 할 정도였다. 긴장한 상태의 신체는 공기를 더 많이, 더 빠르게 소진했고, 물 밖으로 나오면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다이빙을 해서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킨다는 사실은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백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순간과 닮아있었다. 몰랐던 미지의 세계를 알아버렸으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다가가야 하는 마음.
이런 마음으로 이틀 동안 행복한 스쿠버 다이빙을 마쳤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계획했던 것처럼 무사히 스쿠버 다이빙을 마치고, 이제 스카이 다이빙을 할 차례였다.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곳에 도착해서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자유낙하 할 때의 자세와 착지할 때 자세. 특별히 어려울 건 없었다. 일단 경비행기에 내 몸을 맡기고, 그다음에는 다시 한번 숙련된 전문가에게 내 몸을 맡기면 될 뿐이었다.
출발하기 전 경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부터의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끝나고 CD로 만들어주는 패키지를 구매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평생 스카이 다이빙을 다시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드시 남겨야만 하는 영상이었다.
"Hey mate, What' your name?"
영상 촬영자가 캠코더를 들고 말을 건다.
"Alex."
"그래 알렉스, 기분이 어때? 긴장돼?"
"응, 떨려. 근데 아무 생각이 안 나."
"애인 있어? 애인한테 한 마디 해."
".............."
나는 몇 초 망설이다가, '애인 없어'라는 대답 대신, 황당하게도 그녀의 이니셜을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양 손가락으로 만든 그녀의 이름 알파벳 두 글자가 캠코더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그녀와 어떻게 될 줄 알고, 평생 간직하려고 찍는 스카이 다이빙 동영상에 그녀의 이니셜을 남길 생각을 하다니.. 경비행기의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속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림 같은 풍경의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를 바라보며 경비행기는 어느새 구름을 뚫고 올라섰다. 날개 밑으로는 솜사탕 같은 형태의 구름 떼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알렉스, 준비 됐어?"
"응, 준비 됐어."
"이제 우리 차례야."
아까 나를 인터뷰했던 친구가 나를 책임질 만 번 이상의 경험을 가진 스카이 다이빙 전문가였다. 그는 나를 뒤에서 앉고 여러 고리를 체결했다. 나의 몸은 그에게 맡겨졌고, 나는 양팔을 가슴에 모은채 활짝 열린 경비행기 문 옆에 걸터앉았다.
"혹시 뛸 때, 거꾸로 한 바퀴 돌면서 떨어질 수 있어?"
"그럼~껌이지. 넌 완전 베테랑이랑 같이 뛰는 행운아야."
"그래? 그럼 아까 동영상도 거꾸로 편집 좀.."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준비 됐어?"
"응"
"가자, 알렉스!"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나도 발에 힘을 줬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점프를 했고, 거꾸로 뛰어서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쳐다봤고, 빠르게 구름에 묻혔다. 온몸으로 구름을 뚫었고, 마셨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의 풍경을 바라보며 '와~~~~'만 외치고 있었다. 이럴 때 외칠 수 있는 영어 감탄사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국말로 극한의 상황에 놓였을 때 나오는 의성어를 외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한국말을 했으면 욕이 녹화됐겠지.)
해안에 무사히 내려서 어땠냐고 묻는 그에게 '잊지 못할 거 같아, 고마워'라는 말을 전했다. 다 내려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꿈이었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촬영한 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게실에는 간단한 스낵과 컴퓨터가 있었다. 농장에서 줄곧 카라반 파크에서 생활했기에 몇 달 만의 인터넷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 없이 접속한 '싸이월드'에 쪽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오빠, 나 호주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