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농장을 떠났다. 지난 1년간 오롯이 내 편이 되어준 나의 애마 '리나'를 떠나보내고, 나도 떠났다. 농장을 떠나는 것은 곧 호주도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두 달 남짓.
(리나가 어떻게 떠났는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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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들어갈 때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 역시 빈손으로 나오듯, 나의 짐은 호주에 올 때처럼 옷 몇 벌과 카메라뿐이었다. 배낭 하나에 넉넉하게 다 들어갈 분량이었다. 호주 농장에서의 추억은 나의 기억과 카메라 메모리카드에만 남았다. 형체가 있는 물건에 담긴 추억은 과감히 농장에 더 있을 사람들에게 남겨두었다. 버려지는 물건은 없었다. 불필요하게 버려질 물건을 사지 않았었고, 누군가에게는 부족한 물건들이었다.
딱히 계획은 없었지만, 무계획도 계획이라고 했다. 호주 동쪽 해안을 따라 북쪽 끝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호주의 북쪽으로 가면 우리나라에서와 다르게 지구의 극지방과 멀어진다. 우리나라와 가까워진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먼저 가까워져 본다. 그녀가 있던 하늘과 가까워진다.
버스를 타고 24시간을 넘게 달려갔다. '그레이 하운드'라는 버스 회사는 사냥개 이름을 딴 회사 이름과 다르게 빠르지 못했고 오래 달리지도 않았다. 몇 시간 달리면 운전기사를 바꾸면서 달려온 시간만큼 휴식을 취했다. 기사만 교대해서 바로 출발하면 될 일인데, 버스도 휴식을 취해야 하나 보다. 어쩌면 호주 차량들이 높은 평균 주행거리를 가진 비법일지도 모르겠다.
좁은 의자에 몸을 이리저리 구겼다 펴는 시간 속에서, 오전에 출발한 버스는 밤을 지나 다시 낮을 관통하고 어둠이 찾아온 시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좁았지만 그동안 농장 생활에 맞춰졌던 나의 신체 리듬을 리셋(Reset)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스호스텔에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게 얼마만의 집 다운, 숙소 같은 곳에서의 밤인가. 오랜 여정에 지쳐서 금방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누군가 조잘조잘 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Hey, good morning."
"Hey.."
금발의 두 여자가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두 여자는 잠옷 차림이다. 탑과 팬티만 입은 반라의 모습으로 둘이서 조용조용 말을 걸었다. 나는 민망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아.. 나 팬티차림인데..'
당연히 남녀 구분해서 방을 배정해 주는 유스호스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상체를 드러낸 채 침대에 앉아 비몽사몽 한 정신을 차려본다. 그리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침대에 내려와 뒤를 돌아 바지를 입는다. 어차피 팬티나 반바지나 해변과 가까운 이곳에서 웃통을 까고 반바지 하나만 입고 다니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었다. 금발의 두 여인은 나를 전혀 신경 안 쓰는지, 면소재의 탑과 팬티만 입은 채 짐을 챙겼다.
"Where are you from?"
"Spain, and you?"
"Korea, south."
"여행 온 거야? 얼마나 있어?"
"워킹 홀리데이 왔어, 다음 달에 돌아가."
"오 그렇구나. 오늘은 뭐 해?"
"이번 주에 스쿠버 다이빙 할 거 예약하러 가려고."
"아 그래? 그럼 이따 봐. Have a good day."
"Seeya."
북한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서였을까, 표정이 밝아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계심을 조금 내려놓은 듯.. 어쩌면 한국 사람들에 대한 좋은 경험이 있었을까? 그렇게 그녀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시내로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지개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보이는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관광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스쿠버 다이빙"과 "스카이 다이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호바다라고 불리는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의 스쿠버 다이빙과 그 바다를 향해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스카이 다이빙을 하려고 이곳에 왔다. 다른 어떤 것도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하기 힘들거나 할 수 없는 것은 꼭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단, 스쿠버 다이빙과 스카이 다이빙을 연달아서 할 수는 없었다. 잠수병 때문인데, 비행기를 타고나서 최소 하루 이상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 안 되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얼마큼 머물 수 있을지는 스쿠버 다이빙을 언제 할 수 있을 지에 달려 있었다.
스쿠버 다이빙 업체를 몇 군데 돌아다니며 가격과 타고 나가는 배, 어떤 코스로 진행되는지 비교해 보고, 언제 바로 할 수 있을지 체크했다. 급할 이유는 없었지만, 최대한 빠른 일정에 맞춰서 예약을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생각보다 시간 보내는 게 낯설었기 때문이다.
관광지 특성상 혼자 다니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혼자인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지만, 환한 햇살을 배경으로 건물 유리벽에 반사되는 나의 모습을 나는 바라보기 힘들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아.. 스쿠버 다이빙 하러 왔지.'
'왜? 호주에 왔던 목적이 다이빙은 아니었잖아?'
거울 속의 나에게서 묻어 나오는 쓸쓸한 감정은 관광지의 밝은 분위기에 묻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관광만을 위한 도시에 오래 머물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4번의 다이빙을 하고, 하루 쉬었다가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시드니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정도 윤곽이 잡혔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PUB에 가서 간단히 맥주 한 잔 마시고 숙소에 들어왔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밤이면 밤마다 술이나 잔뜩 마시고 곯아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스쿠버 다이빙에는 제약이 많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 병을 얻을 수도 있고,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도한 음주는 절대 금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야 하니까 일찍 잠을 청하며 누웠는데, 아침에 만났던 금발의 독일 여자들이 들어왔다. 이번엔 앳되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함께였다.
"Hey, bro. How are you?"
들어오자마자 불을 켰는데, 자려고 누워있던 나를 발견하고 민망했는지 괜히 말을 건다. 나는 말을 섞기 귀찮아서 눈으로 대충 인사를 하고 다시 누웠다. 하얀색 페인트로 마감된 벽 때문에 더 환하게 느껴지는 이 방에서 이들이 나가기 전까지는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레이 하운드' 버스에서 장거리 이동을 하며 읽으려고 챙겨놓았던 <ATONEMENT>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멀뚱 누워있는 것보다 뭐라도 손에 들고 시야라도 가려야 편할 거 같았다. 그러면서 내 귀는 두 명의 스페인 여자와 한 명의 독일 남자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녀들은 내가 봐도 예뻤다. 이목구비가 조화로웠고, 탄력이 느껴지는 신체를 갖고 있었다. 아마도 20대 초반?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흠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신의 피조물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녀들을 꼬셔보겠다고 용감한 독일 젊은이가 숙소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그녀들도 그가 별로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숙소까지 쫓아와도 내버려 둔 것이겠지만, 딱히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화에서 90%는 남자가 얘기했고, 여자들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꽤 오래 지냈다고 했고, 옆구리에 그린 뉴질랜드 전통 타투까지도 보여주면서 그녀들에게 어필했다. '내 상체좀 봐줘. 이래뵈도 꽤 괜찮은 몸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였지만, 나뭇잎 모양의 타투는 여자들의 관심을 사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들에게 계속 나가서 한잔 더 하자고 꼬드겼고, 그녀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녀들은 그를 거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거나, 그의 끊임없는 자기 어필에 연민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들은 다시 PUB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를 꼬시려고 노력하고, 서로를 탐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농장에서 '그 X'를 만났던 내가, 한국의 그녀를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 좋아해도 될까? 그녀만 모르면 아무 상관없는 것일까..
어쩌면 그녀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호주에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았던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 호주에 왔다고 했지만, 외로움에 결국 무릎 꿇어버린 나약한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내 베개 머리맡에 놓인 책 <Atonement>의 뜻은 '속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