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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0. 바다, 하늘과 담배, 그리고 그녀와 나.

by 라텔씨

농장 생활이 끝에 이르러간다. 앞으로 2~3주 정도 후면 나도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 '토마토의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토신 추종자' 정도로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았다. 나의 계획대로라면 남은 몇 개월동안 여행만 하더라도 호주에 올 때 받았던 장학금보다 더 많은 돈을 남겨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몇 달 동안 할 여행을 계획하며 남은 몇 주를 보내기로 했다.


몰래 남자친구를 숨겨놨던 '니나'가 떠났듯이, 함께 생활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 일자리가 많이 줄었고, 수확량이 적은 상태에서 나처럼 손이 빠르게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돈을 좇아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다시 돈을 따라 이곳을 떠났고, 마을에 활기가 사라졌다. 내가 있는 카라반 파크 역시 한산해졌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모두들 '돈을 벌어야 한다.'라는 이유로 몰려와 치열히 일하던 지난날의 풍경은 사라졌다. 이제는 누가 일찍 일어나는지, 누가 아직 남아있는지도 모를 만큼 평온하고, 누구도 돈을 위해 치열하게 일하지 않는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농장으로 출근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온 마을이 숨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2~3주 돈을 더 잘 버는 곳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남았고, 어떤 이는 갈 곳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남았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는 사람들만 부리나케 살 길을 찾아 떠났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이런 생활이 더 이상 신기할 것도 없고, 일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뿐이었다. 원시 시대에 수렵 생활을 했던 문명 속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해가 뜨면 적당히 과일 따는 일을 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일하고, 먹고, 자고의 반복이었다.


정신없이 일하고, 피곤해서 자야 했을 때는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 여유가 생기자 미친 듯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는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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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앉아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후가 되면 카라반에서 나와 바닷가에 앉아 파도를 바라본다. 작은 해변이라 조용히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를 나 혼자 멍하니 바라보기 좋다. 파도 소리도 작다. 사람도, 말소리도 없고,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한 순간들. 그런 시간에 빠져들면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왜 그녀는 호주에 오지 않았을까.'


호주에서 만나자 했던 그녀를 두고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6개월이 넘었다. 장학금을 받아 비행기표를 샀고, 휴학을 하고 호주에 왔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거짓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상황이 발생한 걸까?


그녀는 도대체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지? 그녀도 결국 나를 이용했던 걸까? '니나'처럼, 혹은 이전에 날 호구 잡았던 사람들처럼, 잠깐의 감정만으로 흔들어놓고는 어느 순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사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녀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멀어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마치 파도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이 제각기 다른 파도에 휩쓸려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파도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내가 먼저 넘어온 파도로 넘어오지 않는 그녀에 대한 씁쓸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이제 몇 달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 가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겠지만, 다시 나의 마음속에 그녀를 사랑했던 감정이 피어날까? 지금 이 감정은 아직도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다. 이미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엮이며 마음은 여러 번 흔들렸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그녀가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그녀가 호주에 같이 왔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떨쳐낼 수 없다.


함께 농장에 와서 이 바닷가를 걷고, 쏟아지는 별을 보며 사랑을 속삭였을까. 매일 고요한 카라반 파크의 새벽 공기를 맡지는 않았을까? 이런 상상은 달콤하면서도 쓰라렸다. 그녀는 결국 오지 않았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보러 갈 마음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수도 없이 밀려왔다 멀어지는 파도처럼, 이 생각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온갖 혼자만의 상상으로 기분이 내려앉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괴로웠다. 간이테이블에는 플라스틱 잔에 따라놓은 와인과 담배꽁초로 가득 찬 재떨이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늘어나는 담배에 재떨이는 시꺼먼 흔적이 가득하다.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완벽하게 아름답고, 담뱃재로 시꺼멓게 변한 재떨이의 모습은 추하고 캄캄하다.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그녀는 석양빛처럼 아름다웠고, 나는 시커먼 담뱃재처럼 부서졌다.' 이런 감정들이 쉼 없이 오갈 때마다 분노, 허탈감, 그리고 허무가 교차한다.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면 좋겠지만 오히려 갈수록 곰곰이 부유한다.


결국 혼자 남겨진 카라반 앞, 석양이 물든 하늘 아래에서 와인잔을 조용히 들어 올린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연기를 내뿜는다. 바람 한 점 없는 저녁 공기가 쓸쓸히 차분하다. 어쩌면 이런 정적이야말로 가장 필요했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서서히 그녀와 나 사이에 깔린 물음을 짚어본다.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올 거야.'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다시 그녀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담담한 얼굴로 '왜 안 왔었어?'라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어떤 답변이 나와도 중요하진 않겠지. 나는 어찌 되었든 그녀 덕분에 호주에서의 자유로운 인생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왜 오지 않았냐는 원망과 함께 호주를 오게 만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 공존했다.




그녀에게 '왜 안 왔었어?'라고 물어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호주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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