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가죽 재킷. 그가 호주로 간 후, 난 이 재킷을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다.
그는 내 검은 긴 생머리가 가죽재킷 어깨를 살짝 덮은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밤공기가 선선해진 가을의 어느 저녁 날.
언니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종종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길에서 마주친 적도 있고, 2층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대문 앞에서 헤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대문 앞에서 인사하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가는 걸 보면 언니랑은 특별한 사이는 아니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우리 집이 그의 집에 가는 길목에 있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번화가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술집 앞은 길을 따라 편의점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깔려 있었고, 테이블에는 소주, 맥주병이 가득했다. 힘없이 출렁이는 플라스틱 의자에 기댄 사람들은 골목이 떠나가라 흥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중에 언니 친구 일행들이 있었다.
"어? 너 동생이다."
"안녕~~~ 한잔하고 갈래?"
언니 친구들이 벌게진 얼굴로 아는 척을 해왔다.
"안녕하세요."
대여섯 명의 무리들은 일제히 언니를 놀렸다.
"너 동생이 훨씬 예쁘다, 아니 둘 다 예쁜데 너 동생이 더 어리니까 더 예쁜 걸로 하자."
"아, 뭐래~~ 병신아 꺼져."
웃는 눈으로 정색하며 찰지게 욕하는 언니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지나가는데, 술집 옆 골목에서 그가 담뱃불을 끄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네가 OO 동생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낯가림이 심한 나는 그를 스치듯 보고 지나쳤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귓가에 남았다. 중저음으로 깔려서 귀에 박히는 목소리. 술 취한 사람들의 소음과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고막을 울린 목소리. 그게 그와의 첫 접점이었다. 웅웅 거리는 술집 스피커 소리 때문에 금방 사라졌지만, 왠지 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그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을 때쯤, 친구와 동네 술집을 간 날이었다. 네온 불빛으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 2층에 자리를 잡았고, 친구들과 정신없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왔다.
"저쪽 테이블에서 다 계산하고 가셨어요."
"네? 누가요?"
2층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니, 그가 친구와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 잘 아는 건 아닌데.. 언니 친구."
"오~~~ 멋지다!"
아무 말 없이 계산을 하고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조금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 그 오빠 연락처 좀 알려줘."
"왜?"
"아니, 그냥 좀 알려줘 봐."
언니는 '얘가 미쳤나'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그의 번호를 알려줬다.
'안녕하세요. 어제 잘 먹었어요. 인사도 못 드리게 그냥 가셔서 언니한테 번호 물어봤어요.'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간단한 감사 인사를 보낸 것뿐인데 왜인지 내 심장이 약간 두근거렸다. 낯선 사람에게 처음 보내는 문자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에게 보내는 문자여서 그런 거였을까?
'안녕, 연락 올진 몰랐는데... 어제는 잘 들어갔어?'
다소 긴장해서 힘이 들어간 얼굴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네, 잘 들어갔어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제가 꼭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뭔가 빚진 느낌은 아니었지만, 예의상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 그래, 알았어. 기대할게. 어제 거기는 자주가? 거기는 떡볶이가 맛있는 거 알지?'
'그럼요, 어제도 떡볶이 먹으러 간 거였어요. 오빠도 자주 가세요?'
'응, 원래 이 동네 술집 다 가보는 게 목표였는데, 이상하게 가던 데만 가네?'
그와의 대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거의 대부분 바로 답장을 했고, 나는 그런 그의 문자가 좋았다. 나는 일부러 대화가 끝나지 않도록 문자로 질문을 이어갔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목소리는 얼마 전 단 한 번 들어봤을 뿐인데, 문자를 읽을 때면 그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것만 같았다. 별 거 아닌 이야기로 주말 내내 문자가 오갔다.
스마트 폰이 없던 그 시절, 내 주말의 끝은 언제나 '개그 콘서트'였다. 그날도 안방에서 언니와 깔깔 거리며 개그 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그'였다.
언니의 수상쩍어하는 시선을 뒤로하고 내 방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고, 들려오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
"여보세요?"
"네.."
"아니.. 저... 그냥.... 왠지 주말이 가기 전에 전화 한 번 해야 할 거 같아서.."
"왜요?"
"아니.. 그냥... 잘 자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아.. 오빠도 잘 자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네... 으응... 오빠."
"가끔 이렇게 전화할게."
"네.. 아니, 응."
심장 박동이 커졌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핸드폰 너머로 내 표정이 그대로 전달될까 봐 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것 같다는 예상은 현실로 다가왔다.
통화 후 잠들기까지 수차례 오고 가는 문자는 그의 다정함을 진한 향기로 품었고, '^^'라고 쓴 이모티콘에는 저절로 핑크빛 볼터치가 묻어있었다. 단 며칠 동안 오고 간 문자만으로 우리는 깊이 끌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요즘의 '썸'이라는 단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문자는 끊이지 않았고, 가끔 전화 통화 하자던 그와 나는 하루에 몇 번씩 통화하며 사소한 일상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기운이 내 머리를 감싸 들어 올려, 내 몸이 떠오르는 듯한 행복한 기분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니가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야, 너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