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새로이 만나는 청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먹는 대로 찌고, 움직이는 대로 빠진다. 건강한 음식을 멀리하면, 건강한 삶과 멀어진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내 몸은 더욱 그렇다. 전날 밤에 김이라도 한 봉지 먹으면, 다음 날 코가 한라봉이 된다. 라면까지 먹으면 눈에 쌍꺼풀이 희미해진다. 한 시간이라도 덜자면, 다음 날 커피를 마셔도 멍하다. 한 주라도 운동을 쉬면 몸이 무거워진다. 그렇기에, 걸음걸이는 숨길 수가 없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뜀걸음에 다급함이 읽힌다. 집으로 돌아가는 갈지(之) 자 걸음에 술냄새가 풍겨온다. 매일 걷는 퇴근길을 터덜터덜 걷는 발에 피로가 묻어난다. 모처럼 떠난 가족여행에서 아버지와 걸음걸이가 닮아있음을 알았다. 대화가 많지 않아도, 함께 살아온 공간과 시간이 묻어 나오는 뒷모습. 새삼 우리가 가족임을 확인했다. 편안해졌다. 좀체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속엣말이 흘러나왔다.
“지현아. 너도 장가가야지.”
말의 힘 덕분일까. 가족여행 후,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닮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또 하나의 아버지. 장인어른인 H. 그의 걸음은 유독 느렸다. 테마파크로 나들이를 떠난 주말. 사파리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처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H는 입구에 피어있는 꽃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월계화부터 백장미. 목향 장미와 잉그리드 버그만. 나의 눈에는 그저 빨간 장미와 하얀 장미의 이름을 척척 알려줬다. 테마파크가 자연농원이라고 불리던 시절. 당시의 상황과 풍경을 담담히 풀어냈다. 이왕 왔으니까 최대한 많이 둘러봐야지! 뽕(?)을 뽑겠다는 다짐을 슬며시 넣어놓았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니까. 그의 속도에 나의 발을 맞추었다. 그제야, 나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이 늘어났다. 시원하게 뿜어내는 분수.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의 손길. 접이식 의자에 앉은 아기의 손을 꼭 잡은 엄마의 마음. 퍼레이드를 기다리기 전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소년의 율동. 주말 전까지, 아니. 주말이 되고서도 달리기만 했던 걸음과 마음을 돌아본다.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장인어른의 시선이 존경스러웠다. 그의 걸음이라면 혼자 걸어도 하루가 풍요로울 거라 확신했다.
혼자 걷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걸어야만 했다. 밀려오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까. 30개월 즈음된 아기가 무엇이든 자기가 하려고 하는 마음은 당연했다. 먹는 것도. 먹여주는 것도. 걷는 것도. 봄(태명)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에게 뛰는 건 허락이 어려웠다. 걷는 아기가 손을 놓고 뛰려고 했다. 손을 놓지 않았다. 봄이 힘으로 손을 떼냈다. 달리는 그를 어쩌질 못했다. 몸만큼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던 탓일까. 하지 말아야 할 곳에 뽀뽀를 하고 말았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오른쪽 윗입술에 피가 나기 시작했다. 걱정보다 아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답답함이 앞섰다. 뛰지 말라는 말을 몇 번했냐고 불같이 따져 물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진화에 나섰다.
자기는 혼자 좀 걷고 와.
억지로 시작한 걸음이 마음을 정돈시킨다. 아이가 억지로 손을 놓는 순간. 그전에 천천히 걷게 허락했어야 했다.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무엇보다, 넘어지고 울고 있으면 먼저 안아줘야 했다. 괜찮냐고 안위를 물어야 했다. 다치더라도 시도한 것 자체가 멋진 모습이라고 칭찬해줘야 했다. 돌아가자. 다시 만나면 사과하자. 큰 소리 낸 것이 미안하다고. 존재 자체로 멋지다고. 다음에는 아빠와 함께 달려보자고.
10개월 정도 지난 주말. 마트에서 돌아가는 길. 아내와 킥보드를 타는 아이가 내달린다. 양손에 장을 본 짐을 들고 있는 나는 따라가지를 못한다. 한참을 앞서가다가 봄이 멈춘다. 뒤를 돌아본다. 아빠를 보며 가을 햇살처럼 웃는다. 따사롭다. 킥보드 바퀴로 달린 거리를 고사리 같은 발로 되돌아온다. 아빠 앞에 도착해서 멈춘다. 대뜸 내 손을 잡고 말한다.
“내가 와 줘서 고맙지?”
“그럼! 태어나줘서 더 고마워.”
두 남자의 걸음은 아내를 향한다. 셀 수 없이 걸은 퇴근길이기도 하다. 장인어른의 속도로 주변을 바라본다. 가을로 옮겨가는 나뭇잎이 반갑다. 봄과 같이 킥보드를 타는 소녀의 웃음이 정겹다. 속도와 상관없이 함께 걷는 것만으로 충만하다는 걸 배운다. 익숙했던 길이 새로워진다. 우리를 기다리는 그녀 앞에 도착한 아기가 말한다.
“엄마 손도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