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물을 좋아하니까 비건 해초 비빔밥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서래는 해준에게 남편과 함께 산에 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며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지혜롭지도 어질지도 않지만, 산보단 역시 물이 조금 더 좋다. 그래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바다뿐만 아니라 온갖 물을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물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물에서 노는 것도 좋아하고 물을 바라보는 시간도 좋다. 출퇴근하는 길에 지나가는 공원에 있는 호수 위 윤슬도 좋다. 바다 냄새도, 파도 소리도, 물로 만든 위스키와 맥주를 해변이나 강가에서 마시는 것도 좋다. 누군가와 나란히 물가에 앉아 그렇게 “물”을 마시며 나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뱉어버리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특히 바다 앞에서 나는 작아진다. 내 문제들도 작아진다. 나는 자존심이 세서 작아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바다 앞에서 작아지는 건 이상하게 좋다.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바다 앞에서의 축소는, 내게는 우울이라기보다는 어떤 의식 같다. 쓰다 보니 지금 당장 바다에 달려가고 싶은데, 일을 해야 하니 오늘은 동네 호수의 윤슬로 만족해야겠지만.
바다와 물만 좋아한 게 아니라, 해산물도 참 좋아했다. 회나 초밥부터 성게알, 연어알, 날치알까지, 어떤 존재들의 몸과 그 맛을, 갓 태어난 것부터 그 내장까지 다 “좋아했다”. 비건이 된 뒤, 이제 나는 살아있는 해양 생물과 동물이 좋다. 인간이 물고기나 해산물, 어류, 어패류라고 느슨하게 이름 짓고 이용하는 죽은 몸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할 곳에서 온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 말이다.
비건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도축 영상을 봐서도, 비거니즘 관련 다큐 때문도 아니다. 밑에 적혀있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물론 전제는 과학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동물들은 고통을 감각한다는 것이다.
- 동물착취와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식품과 물건들을 먹지 않고 쓰지 않는 내 고통 < 착취당하고 죽게 되는 동물들의 고통
- 생명유지와 크게 관련 없는 내 기쁨 < 고통을 감각하는 존재가 실제로 겪는 고통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논리적, 윤리적 결함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건을 지향하는 게 그런 내 결함을 줄이는 일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해양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지각할 수 있다. 바다에 사는 동물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하나만 보더라도,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사는 법을 익히고, 계속해서 살아있으려고 한다.
확실히 비건 레시피를 고민하다 보면 안 쓰던 머리를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되는 사실들은 나를 조금은 똑똑해지게 하는 느낌이 든다. 아직은 느낌뿐이긴 하지만, 언젠가 이런 배움들이 지혜가 되는 날을 기다려 보며, 해초 비빔밥을 만들었다.
원래 해초 비빔밥엔 종종 “해산물”도 들어간다. 특히 알 종류가 좀 들어가는데, 이걸 대체할 방법을 찾다가 https://bakinghermann.com/all-recipes/fruit-pearls 에서 답을 찾았다. 나는 고추장과 오렌지를 넣어 색을 냈다.
초장 소스도 직접 만들었는데, 레시피를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긴 하지만, 나는 매실액과 미원을 살짝 넣는다. 비건이라고 조미료를 안 쓸 이유는 없다. 지혜란, 적절한 것을 적절한 때에 잘 쓰는 것이기도 하므로.
*초장/해초비빔밥 소스 레시피
-간장 1/2 큰술
-유기농 설탕 1/2 큰술
-고추장 1 1/2 큰술
-매실액 1/3 큰술
-사과식초 1/2 큰술
-올리고당 1/2 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2 큰술
-고춧가루 1/2 큰술 (매운맛 추가하고 싶을 때 좋다. 생략해도 괜찮다.)
잘 섞은 뒤 30분에서 하루 정도 냉장고에 숙성시키면 더 좋다.
*간단 버전 : 고추장2, 식초0.5, 참기름0.5, 설탕1
내가 먹을 거지만, 대접한다는 느낌을 내고 싶을 때, 플레이팅하고 싶을 때 좋은 비장의 무기는 라이스페이퍼 튀김이다. 잔뜩 튀겨 술안주로 먹어도 된다. 다이어트에 도움은 안될 거다.
*라이스페이퍼 튀김
-라이스페이퍼
-적당량의 식용유
170도 정도로 기름이 끓어오르면, 라이스페이퍼를 넣고 재빨리 튀긴 뒤 건진다. 대한민국 인터넷보다 빠른 속도이므로, 딴짓하면 안 되고 집게 들고 건질 준비를 해야 한다.
밥과 장이 좋고, 여러 해초의 식감이 더해져 이미 충분한 한 끼였지만 데친 새송이 버섯, 오이와 토마토로 아삭함을 더하고, 라이스페이퍼의 기름기가 더해져 아쉬울 게 없는 훌륭한 비빔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