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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대리 Aug 24. 2023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5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어둠의 자식들(1981)>의 조연출을 거쳐,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장편 연출 데뷔작을 발표한 배창호 감독의 4번째 장편 연출작인 <고래사냥(1984)>은 최인호 작가가 1983년 출간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975년 가수 송창식의 메가 히트곡 ‘고래사냥’도 빼놓을 순 없다 (하지만 영화 <고래사냥>에 송창식의 노래는 삽입되지 않았다). 1984년 3월 31일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하여, 42만 6천여 명의 관객이 들면서 당시 단일관 기준으로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배창호 감독의 1980년대 작품 대부분에 출연한 배창호 감독의 페르소나 안성기 배우가 각설이 타령을 멋들어지게 불러 젖히지만 뭔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민우를 연기했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 이어 배창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이미숙 배우가 춘자 역을 맡았다. 그리고 불멸의 히트곡 ‘못다 핀 꽃 한 송이’의 가수 김수철이 주인공 병태 역으로 처음 장편 영화 연기에 도전했다.



이렇듯 화려한 면모를 갖춘 영화 <고래사냥>이 극장에서 개봉할 즈음엔 아직 ‘극장 구경’의 즐거움에 눈뜨지 못했던 터였지만, 후에 (다시 등장하는) ‘나 상가 비디오 가게’ 사장님의 배려로, ‘연소자 관람 불가’는 아니지만, 왠지 중학생이 보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던 영화 <고래사냥>을 비디오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철 모를 때 봤던 영화 <고래사냥>은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모여서 보던 친구들과 심드렁해하며 지루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극 중 병태와 춘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자, 갑자기 다들 숨을 죽이며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끝나자 ‘되감기’를 해서 다시 보고 또 보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 한동안 영화 <고래사냥>을 떠올리면, 항상 병태와 춘자의 그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라 스스로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그러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선명한 버전의 <고래사냥>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 지점에서 화들짝 놀랐다. 나이를 한참 먹은 후 다시 본 <고래사냥>은 그저 치기 어린 중학생 때 보며 지루해했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삼포 가는 길>을 연상시키는 세 사람의 로드무비가 흥미로웠고, 안성기-이미숙-김수철-이대근 등 환상의 캐스팅이 펼치는 최고의 연기조합 등을 고려했을 때, 가히 1980년대 배창호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었다. 오프닝에 흐르는 김수철의 히트곡 ‘나도야 간다’의 느린 버전은, 영화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발랄한 원곡 버전과 비교했을 때, 생각보다 절절한 멜로디 흐름이 잘 어울려서 깜짝 놀랐다.


두 번째 놀란 지점은 수십 년 동안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문제의 ‘그 장면’이었는데, 아뿔싸! 심지어 전혀 야한 장면도 아니었을뿐더러, 분명히 동영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스틸컷이 이어진 몽타주 시퀀스였다. 대체 난 이 장면을 왜 ‘야한’ 장면이라 규정짓고 기억저장소에 담아뒀던 것인가! 역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리인 것 같다.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22년 7월 30일 발간한《아카이브 프리즘 #9 Summer 2022 "리와인드 - 비디오 시대의 어휘들》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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