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상가' 비디오 가게
최근 재건축 이슈로 뉴스에 자주 등장한 초대형 아파트단지에서 초중고 12년을 살았었다. 4개 단지로 구분되어 단지마다 상가가 있었는데, 단지 정면 입구 쪽에 ‘종합상가’, 2단지 쪽에 ‘나 상가’, 3단지 쪽 ‘다 상가’ 중, 내가 살던 3단지에 인접한 다 상가 대신 조금 떨어진 나 상가에 있던, 상호는 기억나지 않는 비디오 가게가 내 단골집이었다.
중1 때였나, 첫발을 디딘 이후, 2~3년 정도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일등단골로 드나들었던 그 비디오 가게 사장님께서는, 10대 중반이 될까 말까 한 주제에 영화 선택의 스펙트럼이 꽤 넓었던 나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고, 충분히 자주 드나들어서 단골이 된 이후에도 결코 말을 놓지 않으시고 존대해 주셨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다 보러 다닐 수 없었던 내게 나 상가 비디오 가게는 최신 영화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수 있는 보물창고였고,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1988년 한국 영화 흥행 1위 작 <매춘(1988)>, 포스터 비주얼에 반해서 어느 비 오던 날 밤에 시민 게시판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떼어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게 했던 <애란(1989)>, 1989년 대종상 8개 부문 수상작 <서울 무지개(1989)>, 이문열 작가 원작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강수연, 손창민 배우 주연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등, 주로 ‘연소자 관람 불가’ 등급의 한국 영화 최신작들을 섭렵했었다.
직장인이 된 후, 중고등학교 동창 누군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조문을 갔다가, 당시 기준으로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때, 중2 즈음 한창 친하게 지냈던 친구 H가 나를 보더니, “너희 집에서 <악령 속의 사춘기(1979)> 볼 때 진짜 재미있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었다.
내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를 돌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악령 속의 사춘기>라는 영화를 봤던 것 같기는 했다. 그것도 나 상가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와서, 호기롭게 친구들까지 초대해 다 같이 왁자지껄하게 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