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재로 돌아간 사촌오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왔다. 작년 7월 대장암 선고를 받은 나랑 같은 7월에 오빠는 위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도 비슷하게 빅 5 병원에서 이삼일 간격으로 받았다. 차이라면 나는 전이 없는 1기였고 오빠는 이미 위 상태가 안 좋은 데다 다른 부위로 전이가 된 3기 환자란 점이었다. 나는 가족들의 배려와 건강관리로 지금 괜찮고 화장실 문제로 일상생활의 불편함이 조금 있을 뿐이다.
오빠는 일 년 넘게 지방에서 서울로 항암치료를 다녔으나 갈수록 체중이 줄고 기력이 쇠하더니 내가 지난주 보고 온 후 일 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본 날 오빠는 거실에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던 산삼주랑 각종 술이 담긴 병을 보며 ‘ 저 술을 다 못 먹고 가네’ 했다.
나는 오빠 술을 적게 마셨나? ‘하며 교회도 갔다는 말에 교회도 절도 내 마음이 중요하니 마음속 걸리는 거 있으면 다 내려놓으라고 했다.
살면서 마음속에 걸린 것 없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오빠 인생에 본인으로 인한 것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유독 아픔도 상처도 많았다.
비도 오고 저녁 먹고 자고 가라는 오빠 말을 거절한 뒤남편과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오빠 간병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3교대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올케언니도 쓰러질 것 같아 염려되었다.
자기 성격대로 굳이 주차장까지 우산을 쓰고 따라 나와 배웅한 오빠…. 속정이 깊은 사람, 할 일엔 몸을 사리지 않는 성격, 배려와 눈치 백 단인 사람 오빠 그대로다.
부고를 듣고 함양 시골집에 가 있던 남편이 부랴부랴 와서 달려간 경주 장례식장은 이미 입관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오빠 친구 지인들과 오빠의 세 자녀 친구들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남편과 나는 이미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발인도 보고 오려 했기에 자정이 넘은 시각 나는 테이블 의자를 맞붙여 놓고 잠을 잤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남편은 세 아이의 친구들이 끝까지 빈소를 지키는 자리에서 요즘 Mz 세대들 다시 봤다며 말했다.
아이들은 음식이 떨어지자 치킨과 백숙도 배달시키고 마지막엔 팥빙수도 배달해서 남편과 남은 다른 가족들에게 나눠주더라고 했다. 이튿날 운구와 산소까지 따라온 아이들을 보며 대견스럽기도 했다.
평소 의리가 강했던 오빠처럼 아이들 친구들도 어찌 그리 묵묵히 일하며 자리를 지켜주고 친구를 위로해주는지…. 그 모습에 요즘 아이들도 저런 면이 있구나 싶어 나도 감명받았다.
화장해서 큰 아버지, 큰어머니묘지 옆에 오빠의 유골을 묻었다. 한 줌 재로 남겨진 오빠를 보며 정말 영혼이 없다면 나도 따라 더 오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dust to dust, ashes to ashes" 흙에서 와서 흙으로, 재로 돌아가리라는 말처럼 육체는 그리 떠나나 영혼은 우리가 왔던 곳,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평안함이 있었다.
지난 7월 나는 외출해서 저녁을 먹다가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복수가 차서 살을 찢는 아픔에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며 울부짖었다. 평소 나는 괜찮아졌지만 아픈 오빠가 염려스러워 나도 자주 전화를 하고 집 초대도 하고 만나러 가기도 했었다. 그렇게 마약 같은 거로 견디던 오빠였기의 육체도, 늘 요동하는 감정체도 없어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간 그것이 위로가 될 뿐이었다.
장지로 가기 전 하늘마루 화장터에서 화장한 오빠는 진짜로 한 줌의 재였다. 코스모스같이 가녀린 올케언니의 손을 잡으며 이제는 오빠 잘 보내드렸으니 편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빠는 대여섯 살 나이 어린 올케에게 젊었을 때는 목욕도 못 가게 할 정도로 통제가 심했고,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면 때론 횡포도 있었다. 그렇게 성질이 불같았던 오빠였다. 그래서 나보다 어리지만 늘 보살 같은 잔잔한 표정인올케에게 나는 고마웠다.
우리에겐 속정 깊은 자상한 오빠였지만 남편으로선 빵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올케에게 며칠 전 애 많이 먹였다고 한 오빠말이 올케에 대한 미안함이었을 거라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잡고 임종을 지켰던 올케에게
오빠 마지막 말이 뭐였나? 며 물으니 잘 모르겠는데 (다) 불쌍하다고 했던 거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아픈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살려고 허우적대는 것이 불쌍해 보인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빠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자 슬퍼하며 우는 아이 셋에다 올케, 그리고 형제들을 보고 그리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이 모두 그렇게 불쌍하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오래전 친정아버지를 갑자기 황망히 보내며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가졌다.
당시 직장, 시집 일에 주말엔 교회일 마저 바빠서 아버지를 뵈러 갈 수 없었던 나는 마치 벼락을 맞은 심경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종교를 버리고 오직 내 마음 중심을 따라 살려고 전환했었다. 아버지는 살면서 내가 유일하게 사랑의 빚을 진 분이었다. 그런데 나의 잘못된 생각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할 수 있었음에도 시간을 내지 않았고 보살펴드리지 못했다는 후회와 자책감이 들었다.
그 후 더는 그 어떤 교리(Doctrine)나 원칙을 따라 살지 않고 그때그때 내 마음의 중심을 따라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제 오빠를 보내고 나는 내 인생 두 번째 교훈을 얻는다. 더 무얼 하려는 욕심도 내려놓고 그냥 되는데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기로 한다. 꽃을 보고 싶으면 꽃을 보러 가고, 누굴 만나야 하면 미루지 말고 만나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며 물 흐르듯 마음 가는 데로 살아가기로 한다.
장지에 들꽃이 예뻤다. 피고 지는 꽃처럼 우리도
그리 왔다 그리 살다간다.
* "dust to dust, ashes to ashes" : "흙으로, 재로 돌아가리라"라는 문구는 성경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의 순환을 나타내며, 모든 생명체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흔히 서양 영화의 장례식 장면에서 많이 쓰는 문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