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몸만들기 프로젝트
두 달 만에 집에 돌아왔다. 마치 큰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차올랐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 공간은 어디 하나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익숙한 물건들, 익숙한 온기.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을 감싸는 따뜻한 공기 냄새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아, 내가 돌아왔구나.’ 몸도 마음도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남편은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교체했고, 처음 보는 로봇청소기가 제법 분주하게 거실을 누비고 있었다. 혼자 알아서 구석구석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집 안 곳곳에서 작지만 정성스러운 변화들이 느껴졌고, 그 하나하나가 나 없는 동안에도 이 집이 멈추지 않고 따뜻하게 숨 쉬고 있었다는 증거 같았다.
“엄마,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아. 그런데도 여전히 건강해 보여. 거봐, 우리가 엄마는 잘할 거라고 했잖아.”
큰애의 수수한 미소와 작은애의 씩씩한 목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정말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나 얼굴살 많이 빠져서… 나이 들어 보이지?”
“으이그, 아니야. 전혀 안 그래. 엄마.”
몸은 옷으로 가릴 수 있었지만, 얼굴은 가릴 수 없으니까. 두 달 사이 눈에 띄게 빠진 얼굴살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거울을 볼 때마다 환자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것 같았고 그게 별로였다. 암환자가 된 것도 모자라 두 달 만에 폭삭 늙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내심 속상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말투와 눈빛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예쁜 엄마‘로 바라봐주는 그 시선이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포근하고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난 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마치 긴 휴식을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고 늘 다니던 유기농 매장에 들렀다. 익숙한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오롯이 나를 위한 하루를 정성스럽게 차려냈다. 서울에 가기 전에도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내 손으로 식탁을 채우며 조금씩 삶의 리듬을 회복해 나갔다.
요양병원에 있을 때, 나중에 참고하려고 두 곳의 식단표를 매주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병원 식단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어떤 재료와 조합이 몸에 부담을 덜 주는지, 메뉴와 조리법을 참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내 몸에 맞게 조율해 가며 식사를 준비했다.
치료를 받으면서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소화기계통 암은 수술 후 한 달 동안 평균 5kg 정도 빠진다고 들었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무조건 체중을 늘려야 했다. 지금 이 상태로 수술을 받게 되면 저체중으로 기력이 떨어져 회복이 더뎌질 게 뻔했다. (암 환자의 체중은 생존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떻게 하면 100g이라도 더 찌울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머릿속엔 먹는 것과 체중 생각뿐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먹어야 할지, 매 끼니가 치열한 계산과 고민의 시간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좀 살쪘으면 좋겠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렸겠지만, 지금은 그게 생존의 문제였다.
살을 찌운다는 건 단순히 숫자를 늘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에 회복할 힘을 채우고, 수술 후 무너지지 않을 에너지를 준비하는 일 곧 삶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냄비에서 김이 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K 선생님은 바쁜 일정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시간을 내주셨고, 다양한 자세에서 정적·동적인 검사를 진행하고, 호흡과 보행 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짚어주셨다. 특히 어떤 원인들을 찾아내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은 놀랍기도 했다. 전문가의 시선에서 환자인 내가 여기저기 문제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뒤죽박죽 되어 있는 문제들을 잘 풀어내서 지금 내 몸의 균형을 바로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세한 건 지속가능한 건강 관리 편에서 다룰 예정)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설명을 들으면서 자꾸 웃음이 났다.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내 몸의 상태를 자세히 듣고 있자니, 마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내 몸과 새롭게 인사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하는 순간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 오길 잘했구나,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조금은 막막했던 마음에 희망의 빛을 채워주었다.
사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몸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운동도 꾸준히 했고, 음식도 신경 쓰며 살아왔고, 병원 문을 두드릴 일도 거의 없었다. 자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코어 근육이 조금 약한 편이고, 필라테스를 할 때마다 강사에게 어깨에 힘 좀 빼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정도로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고 믿었다. 몸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들을 그저 피로나 습관쯤으로 넘겼다.
내가 생각한 가장 큰 문제는 수면이었다. 늘 잠이 부족했고, 자는 동안에도 자주 깨고 뒤척였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개운하지 않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데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런 상태가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몸이 오래전부터 보내고 있었던 구조 요청을 그때라도 알아차렸더라면, 내 몸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수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 집에 내려가 있을 때 수술 전까지 별일이 없어야 하지만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나 진료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을 대비하려고 했다. 근처 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에 진료를 한번 가서 나의 기록을 남겨두면 다음에 필요할 때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 혹은 개원의 중에 혈액종양내과 전문의가 있다면 찾아볼 생각이었다.
첫 요양병원 명상 선생님께서 과거에 암 요양병원에서 근무할 때 이야기를 흘러가듯 언급하셨는데, 함께 일했던 정말 괜찮은 의사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수업이 끝난 후 그분이 어디에서 근무하시는지 여쭈어봤고, 병원 이름을 찾아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00도 00시 게다가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였다. 그때 정말, 행운이 나에게 다가오는 중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꾸준히 맞아오던 면역주사는 수술 전까지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방사선 치료의 효과가 몸 안에서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시점이었고,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원하면서 미슬토 주사를 처방받아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서 보내는 6주 동안 지금의 몸 상태를 잘 유지하거나, 어쩌면 더 좋아지기를 기대했다. 그 시간 동안 의료진과의 만남을 통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몸의 변화를 체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집에 온지 이틀 후에 000 내과에 내원을 했다. 그동안의 의무기록지와 영상 자료로 나의 상태와 내원목적을 말씀드렸다. 싸이모신알파 면역주사는 이곳 000 내과 선생님께 처방받아서 맞고, 미슬토는 내가 갖고 간 것으로 주 2-3회 맞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명상 선생님 얘기를 듣고는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워하시면서 매우 반가워하셨다.
사실 현대의학을 하는 의사 선생님들은 요양병원에서 시행하는 면역대체요법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다. 이분 역시 내가 다니던 본병원에서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로 근무하신 경력이 있으셔서, 굳이 면역주사를 계속 맞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셨다. 처음엔 조금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고, 암 환자의 마음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공감해 주시며,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해 주셨다.
-궁금한 것들이 있을 때마다 내원하면 성심껏 대답해 주시고 논문을 찾아 해당 사례들을 설명해 주셨다.
-본병원 의료 파업으로 이곳 내과에서 수술 전에 필요한 대장내시경 검사를 한 후 결과를 제출했다.
-나중에 수술을 취소하고 지켜보기를 선택할 때에도 비슷한 사례 논문을 찾아 비교해 주시는 등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주셨다.
세상에 이런 의사 선생님이 어디 있을까?
유산소 운동은 걷기와 인터벌 달리기를 병행했고, 요양병원 옥상에서 하던 맨발 걷기는 집 근처 낮은 동산으로 장소만 옮겼을 뿐 그대로 이어졌다. 일주일에 2-3회는 맨발로 흙을 밟으며 걷고, 나머지 2-3회는 공원 운동장에서 인터벌 달리기를 했다. 하루 세 번 식후에는 30분 정도 천천히 걸으며 소화를 시켰다. 집에서는 중력을 이용한 근력 운동과 스퀴트와 런지, 스트레칭도 틈틈이 챙겼다. 운동은 필수였고 즐겁게 일상을 다져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첫 요양병원에서 명상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깊이 있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때 배운 간단한 호흡과 이완 방법들이 이후 내 일상에 도움이 되었다. 매일 저녁 잠들기 2시간 전에는 체온과 비슷한 정도의 온도로 족욕을 20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짧은 명상을 이어갔다. 몸을 천천히 풀어주고 복잡했던 생각을 잠시 내려놓으면 어느새 하루 동안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손끝 치기와 박수, 발끝 치기와 발가락 두드리기 같은 간단한 자극을 통해 말초까지 순환이 잘 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림프 순환을 위한 동작들도 틈틈이 실천했다. 몸의 순환과 이완이 원활하게 되어야 몸이 편안해지고 회복의 길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몸이 보내는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이며 작은 동작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를 보살피는 루틴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하루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마음까지 모두. 이런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나름대로 잘 살아내고 있었지만, 수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쪽에는 늘 염려와 걱정이 있었다.
직장암 수술의 특성상 배변과 관련된 문제는 피할 수 없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수술하면서 인공항문(장루)을 임시로 할 가능성은 20-30%라고 하셨다. 장을 잘라내고 장끼리 연결한 봉합 부위가 잘 아물어야 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복부에 인공항문을 만든다는 것. (직장은 대변 저장 공간이므로) 솔직히 그 부분이 가장 두렵고 그 상황을 상상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다 문득문득 불안이 튀어오르기도 했지만, 다가올 시간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