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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전, 기다림의 시간에는-3

뜻밖의 발견과 수술 전 검사 시작

by ligdow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던 중,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하고 시력이 떨어진 것 같았다. 집에 내려온 뒤, 아는 동생이 운영하는 안경점에서 시력 검사를 받았다. 각막에 점 같은 것들이 보인다며 안과 진료를 권했다. 바로 근처 안과를 찾았고 진단은 백내장이었다.

의사는 “나이가 그럴 수 있어요”라고 했지만, 그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눈인데, 갑자기 백내장이라니. 나이 탓이라 하기엔 뭔가 마음이 걸렸다. 어쩌면, 정말로 항암치료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암을 치료하는 일이 단순하지는 않구나. 항암치료가 몸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내 몸을 더 꼼꼼히 들여다보게 되니 오히려 더 건강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내 몸의 작은 신호들에 귀 기울이게 된 것도 분명한 변화였다.

마음이 개운치 않아 안경점에서 추천해 준 서울 강남에 있는 안과 전문 병원을 다시 찾았다. 정밀 검사를 받고 나서야 내 눈에 유전적인 질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제야 지금 겪고 있는 변화들이 꼭 항암치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단명: 아벨리노 각막이영양증 / 유전자 검사 양성

각막에 비정상적인 단백질이 축적되어 흰 반점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혼탁이 일어나는 유전 질환이다.

흰 반점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거나 눈부심, 빛 번짐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원래 갖고 있던 질환인데 항암약을 먹으면서 점막이 건조해지는 등의 영향으로 이제야 드러난 것으로 추정한다는 소견. 안경을 새로 맞추고, 햇빛 노출은 줄이는 게 좋다며 외출 시에는 선글라스를 쓰라고 했다. 눈을 자주 비비는 습관도 줄이라는 당부가 있었다. 스테로이드 점안액과 인공 눈물을 처방받고 1년 뒤 진료 예약을 잡았다.



시력 저하와 뿌연 증상이 항암약 때문일 거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평생 모르고 지내던 유전 질환이었다.

아픈 것도 아니고 당장 치료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번지는 것 같았다. 모르고 지냈다면 더 편했을지도. 아무튼 이제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질병 하나를 더 알게 되었다. 그래도 큰 병이 되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씁쓸했다.



그 이유는 의사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 때문이었다.

“유전 질환이기 때문에 자녀분들이 나중에 시력 수술을 하게 되면 유전자 검사를 꼭 해보셔야 합니다. "

알게 된 걸 다행이라 여기는 마음과 어쩌면 내가 물려준 것일지 모른다는 미안함이 함께 밀려왔다.

별일 아닐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무거운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면역주사를 맞으러 000 내과에 들렀다. 진료 중 안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드렸더니, 의사 선생님은 어김없이 논문을 찾아보셨다.

“제 경험과 지식으로는 젤로다로 인한 시력 저하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찾아보죠.”

잠시 후, 영어 논문을 찾아 번역해 가며 설명해 주셨다. 유방암 여성 환자 한 명이 젤로다 복용 2주 후 시력 저하를 겪고 약을 중단한 사례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000님의 경우, 젤로다 항암약이 직접 영향을 준 것 같진 않네요. 유전자 검사 결과 양성이라고도 하니. “



사실 나는 귀찮기만 하고 돈이 되지도 않는 환자인데, 늘 진심으로 긴 시간을 들여 상담해 주시는 모습에 감사함이 컸다. 한편으로는 염치없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마음까지도 받아주는 듯한 선생님께 더 깊은 신뢰가 생겼다.

“000님 덕분에 오랜만에 논문들도 찾아보고, 최신 암 치료에 대한 공부도 하게 돼서 좋은데요.”

암과의 전쟁 중에도 나는 고마운 인연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었다. 치료라는 이름 아래 고단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행운처럼 찾아오는 따뜻한 마음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음이 눈물 나게 감사했다.





나를 돌아보고 내 몸을 회복하는 시간인 만큼 마음을 비우고 단순하게 생각하려 했다. 복잡한 감정에 휘말리기보다는 지금 이 하루를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남편과 아이들 챙기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웠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 덕분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고, 나를 믿고 응원해 주었기에 나는 더 안정된 마음으로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불필요한 스트레스 없이 단단한 하루들이 이어졌다.



서울에 올라갈 때 몇 권의 책을 챙겨 갔었다. 치료 중간중간에 읽고 싶었고, 또 시간이 허락하면 글도 써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치료가 시작되고 부작용이 찾아오고, 매일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책 한 권도 펼쳐보지 못했고, 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고 회복이 좀 더 안정된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다시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자주 말해주었다. 지금은 무언가를 이루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나를 잘 돌보는 시간이니까. 하고 싶은 것들은 조금 미뤄두고, 오늘을 그저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지내던 중, 수술 전 검사를 받아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5월 8일, 1차 혈액 검사와 진료만 있는 날. 혈액 검사 결과는 특별한 이상이 없었고, 항문 통증이나 불편한 증상도 없다고 하자 선생님은 수술 날짜를 앞당기자고 하셨다. 6월 13일에서 6월 4일로.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날짜였다. 갑작스러운 변경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현실에 준비가 충분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었다.



“20일 날 하는 수술 전 종합검사, 그 결과를 보고 수술을 결정할 거예요. 암 사이즈가 줄어들었으면 복강경으로 수술할 거고요. 암이 아주 없어지면 더 지켜보며 기다릴 수도 있겠죠. 몸의 반응을 보고 최종적으로 결정할 거예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방사선 효과가 예전에는 6주, 요즘은 8주에서 최대 14주까지 나타나니까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보죠.

암의 위치가 항문에 가깝진 않아서 복강경으로도 충분한데, 본인이 로봇 수술을 원하면 해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비용 대비 효과는 큰 차이 없습니다. 암 위치가 낮으면 그러니까 항문에 너무 가까우면 로봇 수술이 안전할 수 있지만 환자분의 경우는 복강경으로도 충분히 수술이 잘 될 수 있어요. “



마음이 분주해졌다. 평온하던 일상이 한순간에 긴장감으로 바뀌었고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지금까지는 준비운동에 불과했고, 이제야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는 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시로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수술 전 검사 일정

5월 8일 혈액 검사&대장항문외과 진료

5월 16일 대장내시경(집 근처 000 내과)

:본병원 의료 파업으로 외부에서 검사 후 결과 제출

5월 20일 CT(복부 골반 흉부), 심장초음파, 혈액 검사, X-ray 심전도, 소변 검사

5월 20일 MRI

:본병원 근처 연계 병원에서 검사 후 결과 제출



5월 16일 000 내과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며칠 앞두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서울 본병원에 문의를 해보라고 하셨다.

“2월에 대장내시경을 했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도 했고, 이번 검사는 직장과 S결장까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몸도 힘들 텐데 대장 끝까지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병원에 확인 한번 해보시겠어요?

수술이 3주 정도, 얼마 안 남았으니 면역 주사도 이제 그만 맞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작은 부분이라도 조심해야 해요.”



의사 선생님의 태도는 늘 조용하고 섬세했다. 작은 변화 하나까지 함께 고민해 주는 모습 속에서 쌓였던 믿음이 그 순간 더 깊어졌다. 단순한 치료뿐 아니라 환자를 전체적으로 살피고 있다는 감동이 밀려왔다.



드디어 5월 16일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는 날.

“10, 9, 8, 7…”

숫자를 세던 기억이 흐려지며 금세 꿈나라로 향했다.

“000님, 눈 떠보세요. 천천히 일어나셔서 진료실로 가세요.”

몸은 아직 무거웠고 머릿속은 어딘가 멍했지만, 익숙한 이름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진료실로 옮겨 앉은 나는, 의사 선생님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컴퓨터 화면, 그 안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평생 기억하게 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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