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프기도 무덤덤하기도 했던...
암 진단을 받고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며느리인 내가 시부모님께 걱정을 안겨드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연로하신 두 분께 죄송한 마음이 더욱 깊어져 그 슬픔과 무게가 배가 되었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의 건강과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오신 분들이다. 하루에도 열 알이 넘는 약을 드시는 두 분께 내가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서울로 치료받으러 올라가기 전에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려 했다. 그건 며느리로서 당연한 도리이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언제 말씀드려야 두 분이 덜 놀라실까, 덜 걱정하실까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작은 시누이에게 들으셨는지 시어머님께서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오셨다.
“자기야, 엄마가 전화 바꾸래.”
남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안절부절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어머님… 저예요. 어머님,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별일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게 자식 된 도리인데, 어쩌다가 제가 이런 일로 어머님 아버님께 불효를 하게 돼서 마음이 무겁고 정말 죄송합니다. “
“불효는 무슨 그런 소리 말아라. 어멈아, 많이 놀랐지? 누구보다도 어멈이 가장 놀랐지.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살다 보면 잘 걷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거지. 그럴 때는 그냥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서 가던 길 가면 되는 거야. 이번엔 조금 크게 넘어진 거라 생각하기로 하자.
어멈이 그동안 부모님 챙기느라 고생 많았고, 애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정말 애썼다. 거기에 시부모까지 챙겨야 하니 어멈이 쉴 틈이 있었겠냐.
어멈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안다. 이번에 그냥 어멈 좀 쉬라고, 조금 천천히 가라고 주는 시간이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치료 잘 받으면 된다.
괜히 나쁜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시아버지와 나, 아범 우리 모두 함께 어멈을 고쳐줄 거니까 그 어떤 것도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오직 어멈 자신만 생각해라.
지금 상황이 웃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울 일도 아니다. 어멈은 원래 뭐든 잘 해내잖아. 나는 어멈이 잘할 거라고 믿는다. 난 걱정 안 한다. 진짜로! 하하하하하!
오늘 아범 통장으로 돈을 조금 보냈다.
혹시라도 돈 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두고 쓰도록 해라.
며칠 안에 집에 와서 밥 한 끼 같이 먹자.
그때 얼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
목이 메어왔다.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 더 아프게 다가왔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파도처럼 밀려온 것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시는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평소보다 더 단단한 어조로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주신 어머님의 말씀이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었다. 억눌러두었던 감정이 그 순간 터져버렸다. 따뜻한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감동과 감사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날의 어머님은 마치 장군 같았다. 강인함과 너그러움으로 나를 품어주시고, 한없이 넓고 깊은 마음으로 내가 기대 설 수 있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나는 그 사랑 안에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암 진단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시부모님이었던 것은, 두 분이 내게 얼마나 따뜻하고 큰 존재인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는 일이었다. 여든 중반이신 연세에도 여전히 자식 걱정이 먼저이신 시부모님.
깊은 주름 사이로 스치는 따스한 눈길과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 주시던 그 손길에서 따뜻한 햇살처럼 포근한 사랑이 내 안으로 번져왔다. 아픈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그 순간 시부모님의 눈빛 속에는 그 어떤 말보다 깊고 단단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분들의 위로와 사랑은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그 따뜻한 마음 앞에서 오히려 내가 더 단단해졌다.
두 분의 마음이 너무 아프지 않게, 내 병보다 그 걱정이 더 크지 않게, 반드시 잘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
외며느리의 병마 소식이 두 분께 얼마나 큰 충격과 걱정이었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든 중반이신데도 자식 걱정을 놓지 못하시는 두 분께 무거운 짐을 드린 것이 죄송했지만 그래서 더욱 버텨야 했다. 남편의 부모님이자 내 부모님이 되어주신 두 분께 걱정 대신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끝까지 나를 지켜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막상 친정 식구들에게는 쉽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신 지금, 가장 가까운 가족은 분명 형제자매들이지만…… 이미 스스로 거리 두기를 한 상태라 그런지 지금 이 상황과 그들의 반응에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당연히 알려야 했다. 위로나 공감을 바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니까 알리는 게 맞다는 단순한 마음에서였다.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막내 오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고, 다음 날은 둘째 오빠와 올케 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둘째 오빠는 작은 개척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답게 통화 중에 차분한 목소리로 기도해 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막내 오빠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 울먹이면서 “막내야 너는 잘할 거야. 늘 잘해왔잖아”라고 말하며 나를 다독였다.
두 언니들과 오빠에게는 짧은 글로 소식을 전하며, 행여나 서운해하지도 너무 걱정하지도 말라고 전했다. 치료 잘 받고 여유가 생기면 전화를 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도 했다. 눈물을 쏟을 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그들과 전화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그때의 나에겐 너무 벅차고 힘겨운 일이었다.
엄마와 이별한 후 언니 오빠들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었다. 핏줄이라는 게 뭘까, 가족이라는 것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 거리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진심으로 부탁했다. 다른 친척들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위로도 걱정도 그때는 다 벅찼고, 감정보다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받아들이는 것조차 내 몫이었기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게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암 진단을 받고 친정 식구들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빠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신 만큼 혹시라도 가족력이 있다면 막내인 나 하나에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물론 그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진단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언니 오빠들만큼은 아무 일 없이 건강하길, 이번 동생의 일을 계기로 검진도 잘 받고 각자 자기 몸을 잘 돌보며 지내기를 바랐다. 그 마음만은 정말 진심이었다.
언니 오빠들에게 알리고 나니 마음 한편에 묵직하게 쌓여 있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듯했다. 이제는 내 치료와 회복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꼭 풀어야 했던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