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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암 경험이 가르쳐준 것

by ligdow


매일을 계획하고 나만의 루틴을 따라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가려고 애썼다. 지금, 여기에 감사하며 가진 것 안에서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그런 성향이었다.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묵묵히 살아내는 두 분을 보며 열심히 산다는 것과 가족을 위한 사랑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여덟 살 때부터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왔고 공부도 스스로 알아서 했다. 애교 많은 착한 막내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역시 원래 그런 아이인 줄 알고 자랐다.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기뻤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잘 헤쳐나갔고,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하는 일이든 늘 최선을 다하며 즐기려 했다.

“내 인생이니까, 즐겁고 의미 있게 살아야지.”

그건 내 삶의 자세이자 가치관이었다.

장애인복지관에 근무하면서 비인가 장애인시설에 자원봉사를 다닌 것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을 꾸리는 시간 속에서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나는 꽤 잘 해내고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회사일로 늘 바빴던 남편 덕분에 독박육아의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힘든 순간이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말처럼 언제나 다시 웃으며 일어났다. 그렇게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이라는 여러 이름들 사이에서 ‘나’는 대체로 뒷전이었고 나머지 이름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나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고 조금씩 소모되어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할 때가 생각난다. 친하게 지내던 안내실 언니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제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지 말고, 하루에 10%만이라도 너한테 남겨. 그러다 몸 다 망가진다? 너가 하루살이냐?”

그때 늘 괜찮다고 이 정도는 거뜬하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로 대답했다. 젊음과 열정이 앞서서 조절이라는 것은 그 시절 나에게는 낯선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천천히 걷기보다는 빠르게 걷거나 달려왔다. 매번 그랬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나는 막내였지만 스무 살 이후부터는 큰딸이나 큰아들 같은 역할을 해왔다.

2016년 10월, 아빠가 갑작스럽게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도 당장 하던 일을 내려놓고 1년 동안 병간호를 했다. 그 기간 동안 하루 평균 200km를 운전하며 내 집과 친정, 서울 병원을 오갔다.

엄마가 홀로 남으셨을 때도 자연스레 내 역할은 더 커졌다. 엄마를 챙기고 아주 사소한 일까지 해결하며 병간호까지 맡았다.


6남매 중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 역할이 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하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 오빠들에게 서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자식이 여러 명이어도 각자 처한 상황과 방식이 다를 수 있으니까. 나는 나대로 자식된 도리를 다하려 했고, 생색낼 이유도 없었고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장례식 다음 날, 큰오빠의 설명도 이해도 통하지 않는 태도 앞에서 ‘가족’이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른 아침, 모두가 모인 식사 자리에서 그가 던진 모욕적인 말과 행동은 나를 지옥 같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거친 언행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나를 변호해주는 이도 없었다.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무조건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큰오빠였고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날 이후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애써 멀어지지 않으면 계속 다칠 것 같았다. 그래서 연락을 끊고, 만나지 않았고 그렇게 3년을 보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나에게만큼은 해당되지 않기를 바랐다. 억지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그 말 속으로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게 싫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자꾸 올라와 마음이 복잡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지는 상처처럼 관계도 조금씩 이어졌고, 홀로 계신 엄마를 돌보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마주하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엄마 장례식 날과 그로부터 두 달 뒤, 한 통의 전화가 또다시 똑같은 상처를 남겼다. 그날 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쇼파에 내던지며 허공을 향해 난생 처음 욕을 내뱉었다.


또다시 그날 이후 나는 어떤 기대도 관계도 내려놓기로 했다. 살기 위해서 더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단절을 선택했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그냥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분노도, 원망도, 반가움도,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관심과 외면이 주는 효과라는 게 이런 걸까. 고통의 한복판에서 내가 스스로 찾아낸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암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상처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차분히 마주할 수 있다. 특별한 감정 없이 받아들이는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암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도 없는데 굳이 내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 짓고 싶지 않은 그 사람과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것저것 따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오래된 슬픔과 외면했던 감정들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고 싶었다. 과거보다는 현재를, 원망보다는 해결이 필요했다.


암 진단을 받고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익숙한 문장 속에 낯선 단어 하나가 불쑥 끼어든 것처럼 내 삶은 갑작스럽게 달라졌다. 하지만 곧 이 병은 단지 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방식, 생각의 습관 그리고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숙제 같았다.


그 숙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고민하며 잠시 멈춰 섰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물음 앞에 서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따지기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가장 아끼는 방식으로 내 삶을 새롭게 설계해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는 내 일상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앞서 여러 글에서 자세히 다뤘기에 여기서는 간단히 지나가려 한다.


직장암을 진단받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 하나로 나는 나를 돌보고 지켜야 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늘 씩씩하게 뛰어다니던 나를 멈춰 세운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액셀만 밟아오던 삶에 이제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라는 싸인이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마음과 생각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신호였다.


조금 늦었지만, 결국 알게 되었다. 나 아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은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선택이자 앞으로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중요한 전환이었다.


단순하다. 암의 재발을 막는 것, 그것이 이제 내 삶의 가장 분명한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매일의 루틴은 자연스럽게 건강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운동, 식사, 휴식, 마음과 스트레스 관리, 그리고 글쓰기까지 모두 이 목표를 향한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만날 여유는 체력적으로 쉽지 않다. 하루의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지 않으면 금세 지치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신호에 더 귀 기울이며 지금 가장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자주 말하고 있다.

정말 애썼다고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이렇게라도 알려줘서 고맙다고.

예전에는 늘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렸고 나보다 타인이나 가족을 우선하며 살아왔다. 부지런함은 나의 미덕이었고, 쉴 틈 없이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이제는 안다. ‘건강이 최고’라는 그 흔한 말 안에 내가 지켜내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의 우선순위는 다시 쓰여졌고, 지금 그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자주 쉬어가며 단순하고 단단하게, 나답게 나아가고 있다.


2년 내 재발율이 70%라는 고비를 넘기고 나면 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해볼까 한다. 아마도 내년 이맘때 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물론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건강에 집중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해나갈 생각이다.


암으로 인해 2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더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서두르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금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다 보면 어느 날 내가 바라던 그곳에 닿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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