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h에서의 응급실
Peritonsillar abscess. 편도주위농양.
낯설었던 이 병명이, 나의 한 주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신체적으로, 뼈저리게 체감했다.
처음엔 단순한 목감기인 줄 알았다.
익숙한 통증이었기에 진통제와 감기약을 챙겨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통증은 순식간에 심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침조차 삼킬 수 없게 됐다.
나는 계속해서 침을 뱉어야 했고, 억지로 잠이 들어도 고통에 깨어났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 깊은 곳에서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하면서 탈수가 찾아왔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너무 아프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
의지도 함께 사라진다.
몸이 무너지니 정신도 흐려지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는, 그 고통에 눌려 무기력해졌다.
예민해지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졌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도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예정된 여행이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조셀랑과 준비해 온 영국 Bath 여행.
기차표와 숙소는 이미 예약되어 있었고 혼자라면 이미 취소했겠지만,
자기는 괜찮으니 취소하자는 말을 들으니
무리해서라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통증이 더 악화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고,
진통제로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아침 일찍 맞춰둔 알람보다 훨씬 이른 시간, 통증에 깨서 눈을 떴다.
몸은 더 무거워졌고, 그 상태로 유로스타에 올랐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기차로 갈아타 Bath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진통제를 삼키고 눈을 감았다가, 통증에 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Bath.
고대와 로마, 중세의 건축물이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햇살은 맑고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목은 심하게 부어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말이 나오지 않았으며, 의식도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Walk-in Centre’가 있는
Royal United Hospital of Bath로 향했다.
기차역에서 2-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병원
가는 길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까운 생각일까 아니면,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살아왔기에 지금 죽어도 후회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 지점에서 너무 오래 애써와서 지쳐 버린 것인가.
과연 우리는 정말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까.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진심도 분명하지만,
변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은 언제나 한계 안에서 작업해야 한다.
그 길은 쉽지 않고, 그래서 때로는 억울하다.
하지만 그 억울함조차,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기에 어딘가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 돌아보면 이때 들었던 이 생각들도 몸과 함께 아팠던 것 같다.
-
조셀랑이 아니었다면,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없기에 그는 대신 나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고
나는 메모지에 몇 글자를 적어 응급실에 건넸다.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무료이고, 그만큼 대기 시간은 길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자신에게는 커피를 주지 않느냐는 이유였다.
술에 취한 듯 보였고, “저번엔 줬는데, 오늘은 15분이나 기다렸다”라고 화를 내는 걸 보니 이곳에 자주 오는 듯했다.
그의 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은 당황했고,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조용히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
“커피 드릴게요. 하지만 이제 앉아서 진정하고 기다려 주세요.
다른 대기자 분들이 놀라셨어요. 커피에 우유나 설탕 넣어드릴까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말투였다.
그 남자는 이내 진정했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 간호사는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시 다가왔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젠틀맨 보셨죠? 커피는 드렸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녀의 침착하고 따뜻한 대응은 인상 깊었다.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전할 수 없어 아쉬웠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병원에 모든 사람들은 진심을 다해 돌보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환자를 향한 관심과 배려를 잃지 않던 의료진.
그들은 '업무'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단순한 역할 수행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이해와 감정을 담은 '돌봄'이었다.
만약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그것을 마주할 수 있다면-삶에 대한 만족감도 훨씬 깊고 선명해지지 않을까.
-
기다림 끝에 열을 재고, 혈압을 측정하고, 피를 뽑았다.
평소 같으면 무서워했을 주사조차,
그날의 나는 아무런 감각 없이 받아들였다.
고통이 다른 감각을 지워버린 듯했다.
진료 후, 의사는 말했다.
“편도주위농양입니다.”
곧장 동의를 구한 뒤, 고름을 배액 하는 시술이 진행됐다.
마취 후, 주삿바늘이 목 안쪽으로 들어왔고,
살면서 겪은 통증 중 가장 날카롭고 깊은 고통이 밀려왔다.
“You are doing so well!” 잘하고 있어요!
의사의 짧은 위로가, 그 순간 내겐 전부였다.
2ml의 농양이 제거되자,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핫포테이토 보이스’였지만,
숨을 쉴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통이 줄었다.
진통제, 항생제, 스테로이드를 링거로 맞으며
탈수로 말라버린 몸이 조금씩 회복됨을 느꼈다.
작은 물 한 모금을 넘길 수 있을 때는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하룻밤 입원을 권했지만,
조셀랑의 첫 Bath 여행을 병원에서만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 측은 ‘아이스크림 두 개를 문제없이 먹으면 퇴원’ 조건을 내걸었고,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통을 먹어냈다.
그렇게 밤 11시, 이주치 항생제를 처방받고 퇴원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감사했다.
그 병원에서의 하루는, 내게 많은 걸 남겼다.
다음 날, 몸이 조금 나아져 계획했던 일정의 절반 정도는 소화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다시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던 다음 날—
항생제를 먹던 중 갑작스럽고 지독한 냄새가 입 안에 퍼졌다.
농양이 터진 것이다.
병원에 다시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조셀랑은 걱정했지만,
한 시간 뒤면 그는 파리로 돌아가는 공항행 기차를 타야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젠 예전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기차역에 배웅한 뒤,
나는 숙소로 돌아와 한 시간 넘게 고름을 뱉어냈다.
입을 헹구고, 또 헹구고.
억지로 바나나를 씹어 삼키고,
겨우 약을 넘겼다.
그리고 마침내,
몸이 조금 가뿐해졌다.
식욕과 목소리가 돌아왔고,
물도 다시 삼킬 수 있었다.
두 시간 정도의 버스 시간이 남았던 나는 Bath
강가의 작은 공원에 들러, 벤치에 앉았다.
한동안 쓰지 못했던 일기를 꺼내 천천히 써 내려갔다.
똑같은 하늘인데,
그날의 공기와 햇살, 거리의 향은
첫날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더 따뜻했고, 조금 더 선명했다.
그 안에서 다시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며칠 사이, 나는 몸이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천천히 지나왔다.
그저 고통 없이 숨 쉬고, 물을 마시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루를 가능하게 하고, 하루를 충분하게 만든다는 걸 실감했다.
삶은 때때로 아프고 무너지지만,
그 안에는 다시 회복하고 돌아오는 길도 함께 있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얼마나 귀한지를,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것들이 사실은 축복이었음을.
이 여행은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