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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레볼루션: 런던에서 맞이한 라나플라자 참사 12주기

지구의 달, 그리고 나의 4월

by 다다정



4월 22일은 ‘지구의 날(Earth Day)’이다. 이 날을 포함한 4월은 전 세계적으로 ‘지구의 달’로 불리며, 환경을 생각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의 달이기도 해서 나에게 더 각별하다. 그리고 이 달은 지속가능한 패션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되는 뜻깊은 달이기도 하다.



패션 레볼루션에서 온 이메일 - 3년전 추모를 위해 제작했던 그래픽 @da.dajeong





지구의 날 이틀 후인,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 다카 외곽의 라나 플라자 의류 공장이 붕괴되며 1,134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다쳤다. 희생자들은 글로벌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하청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사고 전부터 건물에 균열이 있었지만, 누구도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책임져야 할 브랜드들은 침묵하거나 발을 뺐고, 그 침묵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지속가능한 패션이 단지 ‘환경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다루는 문제임을 각인시켰다. 그해를 기점으로 ‘패션 레볼루션(Fashion Revolution)’이라는 영국의 비영리 단체를 통해 국제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누가 내 옷을 만들었는가? (Who Made My Clothes?)”라는 질문은 내 삶과 일의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서른이 된 올해, 나는 런던에서 지구의 달을 보냈다.



Remake 리메이크


나는 미국에서 시작된 비영리 단체 ‘리메이크(Remake)’의 영국 앰버서더로 2년째 활동 중이다. 리메이크는 의류 노동자의 권리, 기후 정의, 윤리적 소비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가치를 입자(Wear Your Values)”라는 슬로건 아래 변화를 만들어가는 단체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시위에 함께 참여하고, 뉴스를 공유하며,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을 만들어가는 이들과 꾸준히 연대해 왔다. 이 커뮤니티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이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논문, 한국 방문, 박사 과정 및 소셜벤처 준비로 바쁜 시기를 보내며 활동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마음 한편에 작은 미안함이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 리메이크 팀의 리더 레베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라나 플라자 참사 12주기를 맞아, 오는 4월 24일 정오에 런던 방글라데시 고등판무관청 앞에서 열릴 연대 집회에 함께할 수 있겠느냐는 초대였다. 희생자들을 기리고,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글로벌 노동 환경에 대한 목소리를 담아 고등판무관에게 공식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da.dajeong


이 초대는 단지 과거의 비극을 추모하는 자리에 그치지 않고, 지금껏 걸어온 실천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되짚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공유하며 이 날을 추모해 왔지만, 물리적인 거리와 일정의 제약으로 직접적인 참여는 늘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뿐 아니라 몸도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집회 장소까지는 약 두 시간이 소요되며, 당일 저녁에는 이미 예정된 또 Climate Advocate의 지구 행사일정이 있었다. 오히려 그 바쁜 일정은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더 명확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행사 당일, 집회 장소로 향하는 길에 나는 마이크 버너스-리(Mike Berners-Lee)의 신간 도서 A Climate of Truth: 진실의 기후를 펼쳤다. 그는 There is No Planet B와 *How Bad Are Bananas?*의 저자로, 기후 위기와 소비, 시스템을 예리하면서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다.


@da.dajeog


책의 서론에서 그는 우리가 마주한 ‘다중위기(Polycrisis)’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복합적 위기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 책을 가능한 한 진실되게 쓰고자 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편견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그가 자유 시장 경제와 ‘트리클다운(Trickle-down)’ 이론 — 즉, 부유한 계층이 더 부유해지면 그 혜택이 사회 전반으로 퍼질 것이라는 믿음 — 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그는 그런 구조가 실제로는 부자만 더 부유하게 만들 뿐이며, 시장은 단순한 자유가 아닌, 공정성과 형평성, 그리고 규제의 균형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문장들이 라나 플라자 참사와 겹쳐 떠올랐다.

자본주의의 그림자, ‘트리클다운’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된 착취의 메커니즘은 오늘날 패션 산업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우리는 이미 패스트패션을 넘어 울트라 패스트 패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몇몇 기업은 이 구조 속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빈곤을 줄이고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불평등 해소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의료, 교육, 사회 안전망의 기반이 된다.

나는 나처럼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 모두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역에 도착하여 책장을 덮으니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고 이날의 맑은 하늘은 더 밝은 마음으로 해내가자고 다독여주는 듯했다.




새삼 나 런던에 살고 있지를 깨닫게 하는 빅토리아 풍의 건물들을 지나며 현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리메이크 커뮤니티의 사람들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영국 ‘패션 레볼루션’의 부재가 아쉬웠고, 여전히 이 운동이 계속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회를 준비한 Labour Behind the Label 비영리 단체를 비롯해 각기 다른 조직에서 모였지만 하나의 목소리로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 큰 위로와 용기를 안겨주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그 자리에 함께한 이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를 느꼈다. 그들의 존재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확고한 실천이었다.


@da.dajeong


몇몇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춰 전단지를 받아갔지만, 대부분은 무심히 지나쳤다.

패스트패션 쇼핑백을 든 사람들, 무표정한 얼굴들, 스쳐가는 시선들.

낯설지만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7년 전, 나 역시 그 풍경 속 한 사람이었다.
아무 의문 없이 패스트패션을 소비하고 상업적인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던 나에게,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시위 현장은 작지만 결정적인 균열을 남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고, 스스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외면할 수 없는 진실들과 마주했고,

그날 이후 나의 가치와 살아가는 방식은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변화에 대해 감사하며 진정성 있게 살아감을 느낀다.


@da.dajeong


희생자들의 사진 앞에 꽃을 놓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 장면이 퍼포먼스로 끝나지 않기를.

그들의 비극이 잊히지 않기를.


@da.dajeong

청원서는 방글라데시 고등판무관에게 정중히 전달되었고,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시위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작은 실천, 작지만 확실한 영향력


행사가 끝난 후, 같은 방향으로 가던 리메이크 멤버 헤일리(Hayley)와 함께 걷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었고, 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주변에도 전해졌다. 나는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더디게 변하는 사회, 외면받는 진실 속에서 지쳐버려 포기할 까봐 종종 두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 긍정성을 끊임없이 지켜낼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가 세상을 전부 바꿀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어요.

대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래야 계속 갈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아주 이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게 큰 위로와,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친환경적인 생활 방식과 의식 있는 소비 - 사실상 필요치 않은 소비를 줄이는 삶,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을 나누는 일.


나는 콘텐츠를 통해 지속가능한 패션에 대해 더 알리고 있지만, 가끔은 회의감이 든다.

결국 관심 있는 사람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닐까?

소셜미디어와 그 알고리즘은 그 생각을 더 굳히게 만든다.

물질적 가치에 집중된 콘텐츠와 광고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나는 점점 현실과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 묻게 된다.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개개인의 작은 실천이 모여, 결국 또 다른 ‘개인’에게 닿고,

그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큰 변화와 긍정적인 영향으로 확산될 수 있다.


@da.dajeong


그래서 나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고 싶지 않다.

감정에만 기대는 호소가 아니라,

더 나은 시스템을 직접 구현하고, 보여주고, 입증하고 싶다.


내가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바탕으로

이 가치들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패션이 단순한 소비를 넘어,

진정한 문화이자 사회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흐릿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잊히지 않도록,

나는 계속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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