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the UNEP Textile Initiatives 후기
유엔(UN, United Nation)은 1945년에 설립된 국제기구로, 세계 평화 증진, 인권 보호, 국제 협력,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한다. 유엔의 다양한 기구 중에서도 유엔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 Environment Programme)은 환경 분 야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회원국과 자발적 기여금으로 운영되는 유엔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이지만 정치적 영향과 부패도 동시에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시는 2023년 COP 28 (제28회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석유 산업의 협상 문서 수정 및 부패 의혹이다. COP28은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장으로서 이 사건은 유엔의 역할과 신뢰를 훼손시켰다. 나의 친구 Aziza의 어머니는 유엔 차드 (Chard) 국가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지자는 종종 통역가로 유엔 행사에 참석한다. 그는 지속가능성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유엔과 차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드의 평화와 경제적 발전을 위해 많은 유엔 자금이 투입되고 직원들이 파견되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생계를 위해 구걸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유엔 직원들은 가장 안전하고 유복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반면, 정작 현지에는 경제적 불균형이 계속해서 심화되고 있어 자금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라고 했다. 유엔 일부 기관 내 부패나 비효율적인 관리는 향후 기구조적 개혁과 투명성 강화를 위한 논의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지난여름, 석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내 프로젝트 지도교수님이 흥미로운 기회를 하나 소개해주셨다. UNEP 텍스타일 이니셔티브에서 6개월간 진행되는 인턴십이었다.
UNEP (United Nation Envionmental Programme)는 기후변화부터 생물다양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며, 각국 정부, 산업계, 시민사회가 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이들 활동 중 하나로 'UNEP Textile Initiatives 텍스타일 이니셔티브'가 있으며, 이는 글로벌 섬유 산업의 지속가능하고 순환적인 가치사슬 전환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UNEP 텍스타일 이니셔티브 인턴십은 소비 및 생산 유닛(Consumption and Production Unit) 소속으로 배정되며, 재택 또는 파리 사무소 근무로 진행된다. 주요 업무는 리서치와 전략 분석부터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업데이트, 지속가능한 패션 이니셔티브 홍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요구 조건이 섬유 폐기물 문제 해결과 패션 산업의 시스템적 전환이라는 부분에서 내가 연구해 온 이유, 가치,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무급에 6개월간 풀타임 근무가 요구되었지만, 지속가능한 패션을 통한 글로벌 임팩트에 기여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당시 나는 석사 논문으로 이미 매우 바빴다. 주변에서는 무급으로 그렇게 오랜 시간 일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인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나 역시 시간적,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했지만 지원을 결심했다.
패션은 인권 문제와 더불어 전 세계 탄소배출량의 1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산업이 끼치는 영향력 면에서 과소평가된다. 부담은 있지만 패션 산업의 의미 있는 구조적 변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인턴십 지원 과정은 생각보다 더 까다로웠다. 이력서와 추천서 외에도 여러 개의 에세이 질문이 포함되는 서류 절차를 거치고, 약 한 달이 지 나서야 1차 서류 합격 메일을 받았다. 이후 90분간 진행되는 서면 평가(written assessment)에 초대되었고, 정해진 시간에 시험지 파일을 수령한 뒤 정확히 90분 안에 제출해야 했다.
이 평가는 AI 도구를 활용한 표절 검증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제공된 자료를 바탕으로 행사 초청장이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제와 함께, 순환 패션 사례에 대한 학술적 분석을 요구하는 문항들이 포함되었다. 순환 패션은 석사 과정 동안 내가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분야였기에 제한된 시간 안에 무리 없이 제출했다.
몇 주 후, 서면 평가를 통과했다는 통보와 함께 '최종 면접'에 초대 이메일을 받았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최종 합격을 생각하니 동시에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물론 일정 기간 동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저축을 해놓은 상황이지만,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무급의 풀타임 인턴십을 선택하는 게 과연 옳은 결정일까.
이미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합격한다면 어떻게든 해내보자고 다짐했고, 반대로 불합격한다면 이제는 정당한 보상을 받으며 일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기로 했다.
당시 석사 논문 제출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면접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예정된 시간보다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 유엔 최종 면접은 내가 그동안 거쳐왔던 화상면접과 달랐다. 총 4명인 면접관의 카메라가 모두 꺼져있는 상태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보안상의 이유였을까, 면접 후 질문시간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아쉽다. 혼자만 카메라를 켠 상태였기에 조금은 어색했지만, 끝까지 집중하며 나의 전문성과 진정성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면접 말미에 “3월 시작이 가능한가요?"라는 재차 확인하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면접이 긍정적으로 흘러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면접 당시 일주일 이내에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으나, 몇 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유럽 기관의 특성상 행정 절차가 느리기에, 곧 연락이 올 것이라 스스로를 달래며 기다렸다. 석사 과정을 마무리하고 12월에 한국에 다녀왔고 2월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 3월에 인턴쉽이 시작되기에 확인을 위해, HR 담당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냈다. 긴 기다림이 무색하게 빠른 회신이 왔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들은 이미 결과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내 프로파일에 대해 좋게 평가해 준 말들은 감사했지만, 소통 없이 방치된 듯한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기회였지만 나는 이들에게는 수많은 지원자들의 한 명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최종 논문과 파트타임 일을 병행하면서 임했던 이 과정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움이 컸다.
(돌이켜보면, 논문과 개인 일정을 조율해 가며 준비했기에 나의 면접에 접근하는 방식은 전략적이지 않았다. 지도 교수님은 면접 응답 시 STAR 방법(Situation, Task, Action, Result)을 사용하라고 조언하셨지만, 면접 당시의 나는 구조적인 답변보다는 진정성을 더 중요시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주변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은근히 안도했다. 애초에 경제적인 이유로 망설이고 있었던 만큼, 이번 경험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삶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 최소한의 물질적 보상을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일종의 메시지를 받는 것 같았다.
유엔 인턴십을 지원하면서 국제기구의 접근성과 형평성에 대해 더 건설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United Nation 유엔이 추구하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사명은 내가 깊이 존경하는 가치 중 하나다.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s)만 보더라도,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환경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평등한 삶과 사회적·문화적 형평성을 포함한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와 다르게, 유엔은 대부분의 인턴십을 무급으로 운영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유엔의 인턴십 구조는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형평성을 과연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유엔 인턴십에 지원한 것 보낸 시간과 노력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나의 가치와 한계, 그리고 내가 이루고 싶은 변화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려면 기존의 구조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먼저 투자해야 한다.
최종 불합격 결과를 받아들이고, 나의 방향성을 다시 정립하는 시간을 가지며 2월을 보냈다. 그로부터 어느덧 세 달이 지났다.
나는 현재 박사 연구 제안과 맞닿아 있는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며, 나의 지속 가능한 패션의 위한 여정을 담은 글을 쓴다. 이 글도 그 작업의 연장선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길을 걷는 것을 선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패션 산업에서) 부당하게 영향을 받고 종종 배제되는 이들(사람을 포함한 환경)을 지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 언젠가 우리의 길이 더 공정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다시 교차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솔직하게 쓰다 보니 유엔을 까내려가는 글이 된 것 같지만, 기회와 배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것에 대해 UNEP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