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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에코디자인 K-ESPR 그리고 패션의 부재

에코디자인 규제와 동향

by 다다정



CARE ID에 입사 후 유럽과 다른 국내 에코디자인 규제의 방향을 파악을 위한 여러 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에코디자인(Ecodesign)’은 패션을 포함한 제품 전반의 환경 영향을 설계 단계에서부터 고려하는 사고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패션 디자인을 5년 넘게 실천해 온 나에게는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이 주제가 정책과 산업의 언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의 시작점은, 에코디자인을 정책적 프레임으로 제도화한 EU의 움직임이 있었다.





@da.dajeong



EU는 2009년 ‘에코디자인 지침(Ecodesign Directive)’으로 전자제품의 에너지 효율 기준을 마련했고,
2020년 ‘순환경제 행동계획(Circular Economy Action Plan)’을 통해 그 적용 대상을 모든 산업 제품군으로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2022년 3월, EU 집행위원회는 기존 지침을 대체할 ‘지속가능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제(ESPR,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 초안을 발표했다.
이 법은 2024년 7월 EU 이사회와 의회의 최종 승인을 거쳐 채택되었으며, 2025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가장 주목할 점은, EU가 에코디자인 규제의 우선순위 산업으로 패션·텍스타일을 1순위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EU는 에코디자인을 통해 제품의 원재료, 수리 가능성, 재활용 정보 등을

디지털 제품 여권(DPP, Digital Product Passport) 형태로 관리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앞으로 “모든 제품의 지속가능성 정보를 표준화된 데이터 언어로 기록·공유하는 체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즉, 에코디자인은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무역, 정책, 기술, 그리고 데이터 거버넌스가 교차하는 새로운 국제 규범이다.


2027년까지 의류 제품이 첫 번째 규제 대상이 되고, 그다음으로 가구, 타이어, 매트리스 등이 뒤따른다.



@da.dajeong




왜 에코디자인에서 패션 산업이 1순위 일까?




패션 산업은 제품 수명이 짧고, 폐기물과 에너지 사용량이 높으며,

자원 순환의 관점에서도 구조적 비효율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은 단순한 외형적 심미성이 아닌

지속가능성과 심미성이 통합된 설계 철학,

즉 ‘책임 있는 아름다움(Responsible Aesthetics)’을 증명해야 한다.




ECODESIGN TBT Forum – 규제의 양면성


@da.dajeong


한국이 EU의 새로운 에코디자인 규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직접 체감했던 건,

지난 7월 한국무역협회(KITA)와 산업통상자원부(MOTIE)가 주최한 ECODESIGN TBT Forum에서였다.


그 자리는 EU의 새로운 에코디자인 법이 단순한 친환경 정책이 아니라,

무역 규제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현실을 명확히 보여줬다.


한 발표자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친환경 정책은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 확보의 전략적 움직임이기도 하다.”


또 다른 발표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유럽보다 미국에 수출을 더 많이 하니까, 에코디자인 대응은 급하지 않다.”




분명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규제가,
어떤 나라에게는 거대한 무역 장벽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묘하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유럽에서 몇 년간 살아오며 느낀 건,

그들이 단지 ‘이미지로서의 친환경’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축적된 자본과 사회적 여유 속에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사회적·환경적 영향을 직접 체감하고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와 자연이 어떻게 함께 지속될 수 있을지’를 탐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성장과 생존의 속도를 따라가기에 급급했고,

그 차이가 지금의 정책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SG 친환경 대전 2025 – 전시 속의 공백


@da.dajeong



두 달 반 뒤, 9월 25일. 리서치 차 방문한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ESG 친환경 대전 2025 현장에는 ‘에코디자인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꽤나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방문했다.

환경부가 주관한 전시관에서는 “EU ESPR을 벤치마킹한 K-ESG와 K-에코디자인 제도”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한국은 이미 순환이용성 평가제도를 운영 - 앞으로 한국형 에코디자인 제도 (K-ESPR)로 발전시킨다.





그런데 전시장을 둘러보며 묘한 공백을 느꼈다.

유럽의 에코디자인 규제에서 패션 산업이 최우선 순위로 다뤄지고 있음에도,

한국의 에코디자인 논의에서는 정작 패션이 빠져 있었다.


제품의 순환이용성 평가에는 비데, 전기밥솥, 식기세척기 등 가전제품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SG 친환경 대전 2025 @da.dajeong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벽면에는 유럽의 패션 DPP 사례 이미지와 QR코드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작 우리나라에는 이미 CARE ID의 패션 DPP 솔루션이 존재함에도,

DPP의 예시는 TRUTRACE 사례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기에 이 분야를 더 깊이 연구하고,

한국적 맥락에서 전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더 들었다.




에코디자인 정책 포럼 – 대화의 온도



같은 날 오후 열린 제1회 에코디자인 정책 포럼에서는

발표가 끝난 뒤, KEITI(한국환경산업기술원) 연구원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세미나가 인상 깊었다는 인사와 함께,

“왜 한국의 에코디자인 규제에는 패션이 빠져 있을까?”라는 질문을 조심스레 건넸다.

연구원들은 현재 한국에서는 “패션의 과잉생산과 재고 문제 해결”이 정책의 우선순위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DPP보다 리사이클링과 EPR(생산자책임재활용제)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연구원이 EU CIRPASS-2에 지금도 참여할 수 있는지,

CARE ID가 어떻게 EWG1 전문가 그룹에 참여했는지 묻고 신청 링크를 요청했다.


이 대화를 통해 DPP가 아직 한국의 산업 현장까지 깊이 확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연구와 제도적 논의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이 언어가 산업과 디자인의 현실 속에 완전히 스며들기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간극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빈자리를 직접 메우는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이야기
이번 한국 에코디자인 정책 포럼에서 풀리지 않았던 내 질문들은,
그 후 참여한 옥스팜 ESG 컨퍼런스에서 조금은 풀리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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