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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디자이너와 예술가의 사이 (2)

산과 농지의 도시 Aspropyrgos에서의 전시

by 다다정



엘레프시나 (Elefsina)에서 추출주의(EXTRACTIVISM)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뒤, 우리는 또 다른 세계로 향했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니라 산과 넓은 농지가 펼쳐진 도시, 아스프로피르고스(Aspropyrgos, Ασπρόπυργος)였다.


이 여정은 우리가 교류하던 그리스 예술가 에밀리아(Emilia)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지역 문화 프로그램에 우리가 참여하길 바랐고,

직접 아스프로피르고스 시장 마리노스 S. 페타스(Marinos S. Pettas)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시장님은 흔쾌히 전시 초청을 약속했고, 심지어 아테네에서 우리를 태워갈 버스까지 보내주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이 도시는 우리에게 ‘손님’이 아닌 ‘환대받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선물하고 있었다.


@dimosaspropyrgou.gr



산업과 농지 사이, 전환의 풍경




아스프로피르고스로 들어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 풍경과 함께 서 있는 수많은 공장들이었다.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 최근 중국 자본이 들어와 세운 공장들이라고 했다.


논과 밭이 있던 자리 위에 산업이 겹겹이 들어서며 만들어진 이 풍경은, 그저 ‘이상한 조합’이 아니라

전환의 시간 속에서 흔들려온 땅의 이야기였다.


버스에서 내려 밭을 걸어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것은 흙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었다.

재활용 공장에서 날아온 비닐, 바람에 흩어진 조각들, 그리고 밭 여기저기에 박혀 있던 푸른 플라스틱 끈들.


그 끈은 소 사료를 묶는 데 쓰는 가장 저렴한 플라스틱 노끈이라고 했다.

농부들은 비용 문제 때문에 이 재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소한 선택은 땅 속에서 오래오래 분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da.dajeong


그 풍경은 단순히 “오염”이라는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추출주의 구조 속에서 농부들이 겪어야 하는 경제적 현실과 생계의 압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산업지대와 농지가 뒤섞인 단조로운 도시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세대를 이어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땅 위에 켜켜이 쌓인 기억과 삶에서

나는 조용한 ‘돌봄(care)’의 윤리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환대의 테이블


@da.dajeong



우리가 받은 환대는 그 어떤 형식적 초청과도 달랐다.

“우리 동네를 직접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따뜻함이었다.


주민들은 우리를 안내해 밭을 함께 걸으며 오래된 농기구의 쓰임을 설명해 주고,

집에서 만든 음식을 식탁에 올려 나누어 주었다.


전통 의상과 춤과 노래를 보여주며

“우리 문화를 직접 느껴보라”라고 손을 잡아끌던 그 순간,

우리는 어느새 ‘손님’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생태 전환이란 거대한 담론이나 기술 혁신이 아니라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성 어린 ‘돌봄’에서 시작된다는 것

몸으로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COMMON GROUND


여름학교의 마지막 전시 COMMON GROUND를 위한 작품의 이야기를 담을 장소를 선택해야 했다.

엘레프시나(Elefsina) 일 수도 있었고, 아스프로피르고스(Aspropyrgos) 일 수도 있었다.


스위스에서 온 환경예술가 Sula,

대만에서 온 이탈리아 출신 연구자 Francesca,

그리고 언어와 문화의 다리를 이어준, 런던에서 활동하는 아트 큐레이터이자 싸이프로스(Cyprus) 출신 Melissini.


@da.dajeong


우리는 서로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음을 느끼며

우리가 가장 깊이 연결된 사람들이 있는 아스프로피르고스에서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에서 출발했다.

“아스프로피르고스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이 질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1.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

2. 참여형 텍스타일 설치물(태피스트리)




1. 하치(Chatzis) 농장에서의 새벽


다큐멘터리는 아스프로피르고스의 농부 디미트리스(Dimitris)와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 하치(Katerina Chatzis)와 함께 촬영했다.


@da.dajeong


우리는 사비로 택시를 잡고 새벽 5시에 그들의 농장으로 향했다.

단순한 촬영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는 함께 맨손으로 양상추를 수확하고 트럭에 포장하는 작업을 했다.

흙의 온도, 줄기의 저항, 잎을 떼어낼 때 손끝에 전달되던 미세한 울림까지— 그 모든 감각이 손바닥에 남았다.


@da.dajeong

흙이 마르는 소리, 젖은 풀 냄새,

농기구가 땅을 긁고 지나가는 리듬.


그 속에서 그들은

아스프로피르고스 농업의 중요성,

기후 위기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변화,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지역 작물을 지켜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그들의 아르바니틱(Arvanitic) 뿌리는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기억의 고리였다.


@da.dajeong






2. Extractivism을 직조하는 손: 플라스틱 끈 태피스트리



양배추 수확의 시간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손으로 짓는 방식”과

유독 나의 눈에 밟히던 흙 속에 끝없이 걸려 있던 푸른 플라스틱 끈들을 떠올렸다.


그 플라스틱 끈을 하나씩 줍고,

도구 없이 손가락으로만 크로셰 태피스트리를 짜기 시작했다.

땅을 만지던 그 손으로, 다시 땅의 잔해를 엮어내는 작업이었다.


@da.dajeong

이 과정은 단순한 업사이클링이 아니었다.

농부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값싼 플라스틱 끈,


그리고 그 선택이 땅에 남긴 오래된 흔적.

나는 그 구조 전체를 직조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어떤 자원을 사용하며, 그 위에 놓인 노동은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을 재료 안에 담고 싶었다.


이 방식은 여름학교를 관통하던 철학,

‘Thinking Through Making’,

‘만들기를 통해 사고한다’는 태도와 정확히 겹쳐졌다.


작업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Sula, Francesca, 그리고 Melissini는

밭에서 플라스틱 노끈을 함께 찾고,

흙을 털어내고, 물로 씻고, 끊어진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을 도와주었다.


@da.dajeong


나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아스프로피르고스의 주민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이 흐르는 공간에서

이 태피스트리를 완성해 나갔다.



@da.dajeong




How Do You Want People to Remember Aspropyrgos?


@da.dajeong



이곳으로 우리를 이끈 예술가 에밀리아와 함께

우리는 아스프로피르고스의 상징적인 Clock Tower에서 전시를 열게 되었다.


나는 손으로 짜 온 크로셰 태피스트리를

공동 창작을 위한 기반으로 설치했다.


지역 디자이너가 제공해 준 원단을 잘라 작은 리본을 만들고,

주민들이 직접 메시지를 적을 수 있도록 펜을 준비했다.


전시의 위쪽에는 그릭어로 이렇게 적었다.

“Aspropyrgos는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시나요?”


주민들은 준비된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고 나서

각자의 답을 리본에 적고,

그 리본을 태피스트리의 사이사이에 손으로 직접 묶어 주었다.


@da.dajeong

어느새 작품은

그들의 기억과 희망이 실처럼 얽힌

공동 창작물이 되어

그들의 삶, 목소리, 미래가

하나의 직조물 위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타패스트리 사이로 보이는 다큐멘터리의 작은 장면들은

아스프로피르고스 사람들의

일상, 노동, 그리고 희망을

‘틈 사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파괴의 흔적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돕고, 지키고, 연결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삶의 다양성을 기록하는 방식이었고,

공동체의 연결을 기념하는 작업이었으며,

인간과 환경의 상호 의존성을 조용히 축하하는 행위였다.


아테네에서의 전시까지 끝난 뒤 우리는

완성된 작품을 에밀리아를 통해 주민들에게 기부했다.

우리가 받은 환대와 연결의 마음을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고

생태·정치적 논의를 다시 몸의 감각으로 되돌려놓았다.


@da.dajeong




앞으로의 연구와 실천에 남긴 영향


아테네에서의 2주는

나의 연구 방향을 결정적으로 확장시켰다.


• 패션 지속가능성을 넘어 추출주의(Extractivism)와 구조적 불평등을 함께 보아야 한다

• 기술·예술·커뮤니티 협업이 지식을 넘어 행동과 공감을 만든다

• 그리고 무엇보다 돌봄(Care)과 투명성(Transparency)이 생태 전환의 핵심이다


이 배움들은 앞으로 내가 만드는 연구·프로젝트·교육 방식의 기둥이 될 것이다.

행동은 언제나 돌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da.dajeong


끝으로 남은 질문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두 가지 질문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다.


• 우리는 어떻게 돌볼 것인가?

• 우리는 정말로 돌보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앞으로도

내 연구와 실천의 나침반처럼

계속해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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