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Distinction 졸업

최종화 - 연재북을 마치며

by 다다정

학업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들

영국 고등교육 체계에서 학업 평가는 단순히 노력이나 개인적 성향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라, 개인적 편향을 최소화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대부분의 평과 과정은 익명으로 채점되며, 평가자는 평가 시점에 학생의 신원을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석사 프로젝트를 지도했던 슈퍼바이저가 평가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동시에 슈퍼바이저뿐 아니라 다른 튜터들도 함께 평가에 참여했고, 외부 대학의 평가자에 의해 추가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만약 이 과정에서 점수 차이가 발생할 경우, 조정(moderation) 절차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내부 조정이 포함되거나 특정 단계에서 외부 학문적 검토가 더해지기도 한다. 즉, 영국 고등교육 체계 시스템은 개인적 인상보다 일관성, 공정성, 그리고 학문적 완성도를 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Distinction은 석사 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위 성적 등급을 의미한다. 평가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단순한 성적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리고 결코 고르지 않았던 과정의 끝에서 무엇이 평가되고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함께 던지기 때문이다.





산업에서 학문으로

Screenshot 2026-01-04 at 3.12.27 PM.png @da.dajeong


학문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런던에서 지속가능한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산업의 내부에서 의류를 디자인-생산하며,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직접 체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무만으로는 더 이상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쌓여갔다.


특히 지속가능한 패션이 점점 ‘의미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수익을 위한 메커니즘’으로 설명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 패션에서 지속가능성은 크게 심미적, 사회적, 환경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측면의 차원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산업에서 지속가능한 패션은 거의 항상 심미적과 동시에 경제적 층위 하나로 수렴되어 환경적·사회적 결과를 쉽게 주변화시킨다. 이러한 괴리는 다시 학문으로 돌아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영국 런던 예술대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London College of Fashion)의 MA Fashion Futures(2023–24) 과정에 진학했다. 이는 패션의 시스템과 미래, 그리고 책임을 보다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런던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런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작업을 만들고 프로젝트를 오가며 산업 안에 있었지만, 동시에 제도와 교육, 정책, 담론이 어떻게 패션을 규정하는지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나를 더 이상 속도와 결과에만 반응하는 위치가 아니라, 산업을 질문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시켰다.





학업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들


나는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AAS 과정을 이수하던 당시 약 3만 달러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이는 학비의 일부를 충당하는 데 그쳤다. 2년간의 생활을 스스로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특히 가족을 지원하며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상황에서 재정적 부담은 상당했다. 풀타임 스터디와 함께 인턴십, 프리랜서 아르바이트, 학교에서의 드레이핑 튜터 업무를 병행했고, 하루에 3–4시간 정도만 잠을 자며 생활해야 했다.


이 경험은 이후의 선택에 분명한 기준이 되었다. 고등교육은 개인의 의지나 성취만으로 지속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가족의 재정적 지원이나 별도의 자원이 없는 경우,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생존을 포함한 현실적인 재정 계획과 구조를 먼저 세워야 한다. 석사 과정에 합격하더라도 장학금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진학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미리 내려두었고, 학업은 더 이상 ‘의지로 버티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감사하게도 이번 석사과정에서 나는 장학생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런던은 여전히 매우 비싼 도시이게 충분치 않았다. 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저렴한 거주 공간을 구했고, 학생 비자로 허용된 주당 20시간 근무를 활용해 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겹치지 않았다면, 이 과정을 끝까지 마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유학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면, 공부 이전에 생존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져보기를 바란다. 장학금, 체류 자격, 노동 가능 시간, 거주 환경, 그리고 예기치 못한 변수들까지 포함해 재정 구조를 현실적으로 검토하고, 지속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학업을 설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Screenshot 2026-01-04 at 4.43.39 PM.png MAFF Note @da.dajeong



ADHD: 과잉된 집중, 구조를 향한 사고


첫 번째 유닛과 두 번째 유닛의 프로젝트 제안 단계에서 모두 B+를 받았다. (MA Fashion Futures 석사 과정은 최종 마스터 프로젝트만으로 성적이 평가되었고, 그 결과 Distinction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이 과정 중 동기 친구의 추천으로 학교에서 제공하는 Digital Screening (디지털 스크리닝 : 학습 과정에서의 인지 특성과 학습 장애 여부를 점검하는 사전 평가)을 받았고, 그 결과 ADHD 진단을 받았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추천해준 친구 역시 ADHD였고 나의 작업 방식을 보며 검사를 권했다고 했다.


KakaoTalk_Photo_2026-01-04-15-00-22-1.jpeg MAFF23/24 Grade @da.dajeong



이 진단 이후, 나의 작업 방식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ADHD는 집중력 장애로 인식되지만, 내가 겪은 문제는 집중의 부재라기보다 과잉에 가까웠다. 나는 연구 과정에서 종종 하이퍼포커스 상태에 들어갔고, 특히 리서치는 직관적으로 감각이 열리는 영역이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보였고, 각각의 요소가 왜 중요한지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과정 전체를 과부하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어려웠고, 무엇을 제외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 예를 들어 석사 논문의 총 분량은 20,000단어를 넘길 수 없었지만, 참고문헌과 메모만으로 이미 그 분량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내가 박사과정을 고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층위의 질문을 충분히 파고들기 위해서는 더 긴 호흡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고방식은 시스템과 구조를 설계하는 데 있어 분명한 강점으로 작용했다. 패턴과 관계, 구조를 읽어내는 성향 덕분에, 나는 과부하 상태 속에서도 MMTM 시스템을 위한 총체적 프레임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단편 영화를 제작했고, 패션 디자이너를 위한 총체적 프레임워크와 가이드를 담은 플레이북 PDF를 개발했다. 설문과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약 2만 단어 분량의 논문을 작성했고, 포트폴리오를 구축했으며, 학업과 병행해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모든 과정을 어떻게 버텼는지 잘 모르겠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가까웠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학문으로 돌아온 이유는 산업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산업을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속도를 늦추고 내가 속해 있던 시스템을 이해하고, 수사(rhetoric)를 넘어 지속가능성을 질문할 시간이 필요했다. 학문은 실무만으로는 얻기 어려웠던 언어와 프레임, 그리고 방법론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Screenshot 2026-01-04 at 4.33.50 PM.png MAFF23/24 Unit 1 Project Website - by @da.dajeong


AI 그리고 한계


이 과정에서 AI 역시 중요한 도구였다. 석사 과정 중 AI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기도 했다. 언어의 장벽을 넘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정 속에서 리서치·집필·제작을 병행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동시에 나는 AI가 얼마나 쉽게 결과물을 평면적이고 일반적인 형태로 만들어버리는지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명확함이 얼마나 빠르게 피상적인 정합성으로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내 사고’이고 무엇이 단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문장인지를 구분하는 감각이 더욱 중요해졌다.


AI는 학습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대체해서는 안 된다. 사고하고, 질문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평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면서 디스팅션은 더욱 의미 있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운도, 단순한 버팀도 아니었다. 나의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정하고 밀어붙인 결과였으며, 처음 학문으로 돌아오게 만든 이유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시간의 축적이었다.




확장된 시야와 공동체



석사 과정을 통해 나는 런던에서 매우 많은 것을 보았다. 단순히 외국인 노동자로 런던에 머물렀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장면들이었다.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서의 시간은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배우며 일하는 과정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내가 구축한 프레임워크를 사회적 기업의 맥락에서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고, 아테네에서는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로서 자원 채굴(extractivism)을 주제로 한 전시에 참여했다. 특히 아테네에서의 경험은 실제로 자원 채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공동체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만남은 하나의 분명한 인식을 남겼다. 우리가 다루는 시스템과 개념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Climate Advocate로 활동하며 UAL의 기후 행동 커뮤니티에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지속가능성과 책임을 둘러싼 질문들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실천되고 있었다.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러한 대화들은 오히려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나은 변화를 믿는 사람들, 집단적 목적과 상호 돌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 공동체 안에서 나는 세계가 이미 끝났다는 감각 대신, 여전히 변화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확신을 다시 가질 수 있었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Screenshot 2026-01-04 at 4.39.54 PM.png Dear Climate Advocates 2025 @da.dajeong




선택과 귀환


졸업 이후 나는 최종 석사 과정에서 만든 프레임워크를 국내 산업 맥락에서 직접 실험하기 위해 박사과정을 준비했다. 연구 방향을 정리하고, 펀딩을 지원했으며, 몇몇 기회도 제안받았다. 이 과정에서 석사 성적이 박사 진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는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성적이 한 사람을 규정하지는 않지만, 박사과정을 목표로 할 경우 성적이 여전히 현실적인 문턱으로 기능한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국내 순환 패션과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을 중심으로 한 플랫폼을 다루는 CARE ID를 알게 되었다. CARE ID는 유럽 규제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디지털 제품 여권을 단순한 데이터 관리 수단이 아니라, 순환성을 제도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장치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이 회사는 이러한 국제적 규제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약 5년간 국내 환경에서 순환 패션을 실질적으로 실험하고 구축해온 팀이었다.


박사과정에 합격한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CARE ID에서 일하기로 한 결정은 충동이었다. 그 충동은, 내가 속한 맥락 안에서 그것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데 기여해야 할 시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CARE ID가 디지털 제품 여권 솔루션을 만들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순환 패션을 위한 행보를 이어왔다는 사실 또한 나에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다.


현재 나의 업무에서는 순환성이 매우 실무적인 언어로 논의된다. 한국 패션 생태계 안에서 DPP를 테스트하고, T0부터 T7까지의 다층적 순환 패션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들이다. 이 논의들은 합리적이고 운영 중심적이지만, 동시에 나를 자주 불편하게 만든다.


산업에서 지속가능성이 얼마나 쉽게 ‘준수’, ‘효율’, ‘확장성’의 언어로 환원되는지를 다시금 체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의 질문이 되돌아온다. 순환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어떤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가.


KakaoTalk_Photo_2026-01-04-17-01-43.jpeg




마무리


이 글은 이 지속가능한 패션을 위한 영국에 대한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졸업 이후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이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박사를 준비했고, 국가를 옮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삶은 계속 흘러갔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하나의 닫힘이 느껴진다.


기록은 쉽지 않다. 특히 영어로 쓰고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은 더욱 그렇다. 나는 완벽하게 이중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자주 막히고, 자주 고친다. 그래도 계속 시도한다.


지금은 학문적 시기를 공식적으로는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다. 그러나 나의 일은 여전히 리서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석사 과정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자산일 것이다. 리서치하는 법, 지식을 종합하는 법, 스스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법, 시간을 관리하고 역량을 확장하는 법.


그 과정은 단지 지속가능성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로서의 자신감을 넘어,

지식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감을 남겼다.







이 연재는 빠르게 소비되는 글을 전제로 쓰이지 않은, 다소 개인적인 여정의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러 차례 멈추고 돌아가 기록을 다시 써야 했다. 그로 인해 읽는 호흡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1년 반의 기록을 함께 들여다봐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keyword
이전 19화Critical Evaluation : 비판적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