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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선 그은 날

너도와 나도, 그리고 우리

by 도시 나무꾼 안톤
모든 사람은 원(Circle)을 갖고 태어난다


꽤 오래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대사였다.

원시시대 어디 쯤.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닥불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에서 배운 이야기를 손자에게 전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원(Circle)을 갖고 태어나. 그리고 원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며 살지. 어떤 사람은 원안에 가족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부족 전체가 있지만, 자기 혼자만 있는 사람도 있어. 원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야"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정확히 떠올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루했던 영화에서 저 장면만 매우 강하게 인상이 남았다. 손자에게 전하는 원시인 부족 노인의 말이었지만 내게는 '아.... 저거다' 싶은 아주 현실적인 조언으로 들렸다.

선조의 지혜로 학교에서 배워왔던 내용들은 어딘가 현실성이 부족해보였다. 수도자의 삶같이 지나치게 이타적으로만 보이는 고전이거나 '속이는 것은 신의 능력'이라며 지나치게 이기적인 현실 처세속에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시각으로 보였다. 원이 작아질 수록 이기적이 되며, 원이 커질 수록 이타적이 된다. 그러면서도 원안의 사람들에게 잘 해준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놓치지 않는다.


나의 원(My Circle)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원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조금은 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원안의 사람 일부가 들고 남도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원이 작아지기는 쉬워도 획기적으로 커지는 것은 좀처럼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원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라 하지 않았을까?

나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큰 사람'도 많고 '작은 사람'도 참 많겠지만 이 글에서 '나의 크기'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자책하는 시간을 굳이 만들지 말자) 다만 크든 작든 원의 경계선을 이야기하려 한다. 원안과 원밖을 가르는 선은 크기와 관계없이 또 누구나 갖고 있다. 그 선을 긋는 기준은 제각각 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그 선을 그으며 산다.




목공방의 동물전쟁


공방에서도 경계선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이 있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는 완전한 고독과 어둠의 시간이 된 공방의 밤. 주변이 칠흙처럼 어두워지고 떠돌이 개 서너마리가 동네 깡패처럼 다른 개나 고양이들에게 위세를 부리고 위협하며 지나간다. 떠돌이 개들 몇마리 때문에 119가 출동하기도 한다. 혼자 있는 밤에 조금 무서워지면 몽둥이가 될 만한 각재를 옆에 챙기고 괜스리 드릴을 돌려 소리를 내고, 라디오 볼륨을 조금 더 높인다.



공방밖 밤세상에서는 작은 동물들의 생존투쟁이 벌어진다.

하루는 고양이 한마리가 전날 밤 떠돌이 사나운 개들과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다리에 뼈가 보이는 큰 상처를 입고 공방을 찾았다. 그 날부터 공방의 여성회원들이 팔걷고 나서 고양이를 살폈다. 고양이 특식이 공방 한켠에 쌓이기 시작했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혹시 모를 깡패 개들의 위협으로부터 격리했다.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건강검진까지 했으니 아마도 그 녀석은 태어나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을 환대를 받았을 것이다.

녀석이 다친 것은 불행이지만 우리 공방에 찾아 들어온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수컷이지만 이름을 '나비'라 짓고 보살피다보니 나중엔 살도 피둥피둥 쪘는데 이 소식이 슬슬 동네 길고양이 업계에 알음알음 알려진 것 같다. 정처없이 떠도는 고양이들 사이에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자, 날이 갈수록 공방을 찾아오는 고양이의 수가 늘어만 갔다.


큰 부상을 입고 공방을 찾아온 '나비'


정이 많은 공방 회원들이 찾아오는 고양이들을 마다 않고 음식을 나누어주니 흰고양이, 점박이 고양이, 호랑이 무늬 고양이, 코흘리개 고양이, 못난이 등등 점차 인산인해를, 아니 묘산묘해를 이뤘다.

영역동물이라고 하는 고양이가 같은 영역에 붐비기 시작했고 그러자 다시 생존투쟁이 시작됐다. 수많은 고양이가 나비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한 것. 그런데 '평화주의자'인 나비는 영역을 사수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른 고양이가 눈치보며 가까이오면 먹이를 같이 나눠먹거나, 사나운 고양이가 찾아오면 아예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이런 모습에 오히려 공방 회원들이 속이 탔다.

사람의 손을 탔던 것인지, 나비는 야생성이 별로 없어보였고 바깥 고양이들은 사람을 심하게 경계해 다행히 나비는 공방안에서 회원들의 사랑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녀석, 암컷 '나리'가 나타나기 전까지...


왼쪽부터 나비, 흰둥이 / 코흘리개는 좀 지저분해서 사진제외
왼쪽은 공방밖 흰둥이들. 오른 쪽이 공방 일진, 암코양이 나리


암코양이 싸움꾼 '나리'가 나타나자 공방밖 고양이 춘추전국시대가 일순간에 정리되었다.

공방 여기저기서 고양이 비명이 들리는 아주 잠깐의 치열한 냥이 전쟁이 있고난 후, 서열1위를 차지한 암컷 '나리'가 공방앞을 당당히 차지했다. 공방안 수컷인 나비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하늘 아래 왕이 둘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평화주의자' 나비는 공격적인 나리의 기세에 눌려 얼마 안가 공방밖으로 쫓겨났다. 그때부터 나비는 걷돌기 시작했고 감히 공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했다.

공방에 사람이 24시간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고양이 세계의 논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나리는 공방안, 나비는 공방밖 그 외 코흘리개, 못난이, 흰둥이 등은 더 멀리 자리를 잡았다. 목공방에서는 나리의 눈빛 하나로 아슬아슬하게 "1냥 독재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리가 임신했다.


아니 누가 겁도 없이 서열 1위를 임신시켰을까?

공방의 회원들은 절대권력자 나리를 임신시킨 고양이가 누군지 몹시 궁금했고, 회원들끼리는 볼 때마다 저마다의 논리로 갑론을박했다. 하지만 여왕의 간택을 받은 아기 아빠가 누군지 잘 좁혀지지 않았다. 여전히 공방밖을 서성이며 나리가 외출했을 때만 공방을 방문하는 수많은 녀석들중 하나일텐데... 공방 최대의 미스터리가 나타난 것.


공방에서 태어난 '느티'


상당한 시일후 새끼 고양이가 태어났다. 공방앞 큰 느티나무 한그루 아래, 잔인한 투쟁과 뜨거운 애정의 산물인 새끼인지라 이름은 나무의 이름을 따 '느티'로 정해졌다. 우리는 느티의 생김새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아빠가 누구인지 최고의 단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느티의 생김새는 아빠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붕어빵처럼 닮은 녀석은 한 놈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마의 무늬는 확신을 주고도 남았다. 아빠는 '나비'였고 여왕의 선택은 '평화주의자'였던 것으로 출생의 미스터리가 풀려나갔다.

나비가 한번씩 공방에 와서 새끼를 들여다보는데, 나리가 허락하는 모습에 더욱 확실해졌다. 면회도 나리가 정해준 시간만큼 할 수 있었고 너무 오래 있으면 나리에게 뺨을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느티의 아빠, 나리의 남편은 나비임이 확실했다.


나리와 느티 / 모자지간
나리와 나비 / 부부지간


공방의 골품제도(骨品制度)


공방을 처음 찾아왔던 '나비', 치열한 투쟁끝에 서열 1위가 된 '나리' 그리고 나리가 선택한 임신으로 공방에서 태어난 '느티'. 이 친구들은 공방 최고의 손님이다. 이른바 성골(聖骨)이다. 그외 공방밖을 서성이는 수많은 고양이들은 나리의 심기에 따라 진골, 6두품, 5두품 등으로 행동반경이 정해진다.

나리가 정한 골품제도(骨品制度)는 엄격했다. 나리가 허락하지 않은 행위를 하거나 공방내로 무단진입하는 경우, 나리의 무자비한 공격이 반드시 있었고 냉혹한 야생의 시간이 지나면 차가운 평화의 시간이 오곤 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 보면 문득 생각하나가 떠오른다.


'나리는 사람인 우리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 것일까?'


성골의 위라면, 혹시 신(神)?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마자,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아직 느티가 엄마의 보호하에 있고 사람인 내가 버젓이 옆에 있는데, 새끼인 느티가 보는 상황에서도 나비를 불러들여 교미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알았다. 나리에겐 내가 신이 아니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대상'이라는 걸...

먹이는 주는 사람을 개는 '주인'으로 생각하고, 고양이는 내 먹이를 챙기는 '하인'으로 여긴다더니 그 말이 진실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나리와 나비의 19금 장면. 이들의 자식인 '느티'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나리의 후손들이 공방을 차지하고 있다. 나리가 종종 공방을 찾아오긴 하지만 간단히 먹을 것만 얻어먹고 다시 사라진다. 그녀의 후손들을 알아보는지 모르겠지만 일정 정도 거리에서 커버린 자신의 새끼들을 지켜보다가 사라지곤 한다. 영역동물이라고 하지만 나리는 자신의 영역이었던 공방을 스스로 후손에게 넘겨준 것 같다.


너와 나, 선을 가르는 기준


'나리'의 공고했던 지배체제를 지켜보며 그녀에게 공방 안과 공방 밖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흰둥이, 점박이, 호랑무늬, 코흘리개 등등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오려던 녀석들은 에외없이 쫓겨나지만, '나비'만 출입과 먹이나눔이 허락되었다. 새끼인 '느티'의 아빠니 당연해보이지만, 간혹 나리의 심기를 건드리면 심심찮게 두들겨 맞으며 공방밖으로 쫓겨난다. '나리'의 원안에는 자신과 느티가 있고, '나비'는 경계선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은 나리가 "너도 가족"이라고 인정하느냐에 달렸고, 바깥 고양이들은 아무리 "나도 가족"이라 우겨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방의 성골 고양이 가족. 나비(수컷), 나리(암컷), 느티


나무에도 "너와 나"의 경계선에 있는 녀석들이 있다. 어떤 놈은 원 안에 있고, 어떤 놈은 원 밖에 있다.

'너도'와 '나도'가 붙어있는 나무들로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나도박달이 대표적이다. 밤나무나 박달나무가 아니라 왜 "너도밤나무"이고 "나도밤나무"고 "나도박달"일까? 나무쪽에도 공방의 나리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생물분류체계를 "종속과목강문계"로 나눈다. 종(Species) → 속(Genus) → 과(Family) → 목(Order) → 강(Class) → 문(Division, Phylum) → 계(Kingdom)로 앞으로 갈수록 작은 그룹이고, 뒤로 갈수록 넓은 범위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Family)"다. 즉 같은 가족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이 된다. "나의 목기시대" 연재의 나무구분은 그래서 과(Family)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너도밤나무는 영어로는 비치(Beech)라고도 불리고, 목재 이름으로는 '비치'나 '비취'가 자주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에 대해서는 여러 버전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공통적인 내용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울릉도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태하령에 밤나무 백 그루를 심으라고 했다. 만약 백 그루의 밤나무를 심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린다고 경고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의 명에 따라 밤나무 백 그루를 심었고, 밤나무에서는 싹도 나고 잎도 나면서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찾아와서 숙제검사를 하게 되는데 아무리 세어봐도 백 그루가 되지 않고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다. 산신령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화가 났다. 마을 사람들은 겁을 먹고 떨고 있었다. 분명히 밤나무 백 그루를 심었지만 그동안에 한 그루가 말라 죽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산신령에게 벌을 받을까 벌벌 떠니 다른 나무들도 겁이 났다. 소나무, 섬잣나무, 동백나무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을 사람들을 걱정했다. 산신령이 마지막이라며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목소리는 아흔아홉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라고 소리쳤다. 산신령은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결국 "밤나무"로 인정해 주었고 마을사람들은 큰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이야기는 울릉군에 전해져 내려오는 너도밤나무 설화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버전도 있는데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태어날 아들이 호환으로 죽을 운명이니 저주를 없애려면 집 뒤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 명했고 나중에 산신령이 나타나 세어보니 두 그루가 죽어서 98그루만 밤나무였다고 한다. 바로 그 때 옆의 두 그루가 제각각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라고 해줘서 무사히 100그루로 인정받았고 그래서 그 아들은 훌륭한 유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절묘하게도 이이 선생의 호인 율곡(栗谷)밤나무 골이라는 뜻이라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 설화에서는 공방의 나리 역할을 산신령이 하고 있다. "너도 밤나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산신령이 인정하지 않았다면 나무 혼자 외치던 "나도 밤나무"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래서 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같은 가족이 되었고 실제로 식물학적으로 과(Family)가 참나무과(Fagaceae)로 같다. 반면에 "나도밤나무"는 같은 과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너도"가 붙으면 같은 과(Family), "나도"가 붙으면 다른 과(Family)가 된다.


나도밤나무. 밤나무와 너도밤나무와는 다른 과의 나무로 열매를 먹을 수 없다. (국립생물자원관)


"나도박달"이라는 나무도 있다. 우리나라의 공식 명칭은 "복자기"로 "복을 자신에게 주는 나무"라는 뜻이다.

이 친구는 왜 스스로는 "나도 박달나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일까?

복자기는 소힘줄 같이 견고하고 단단함으로 우근자(牛筋子)라 불리는데, 예로부터 수레의 차축을 만들 때 박달나무를 제일로 쳤으며 다음으로 복자기나무로 만든 것을 알아주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왜 "나도박달"이 되었는지 짐작을 해볼 수 있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Betulaceae), 나도박달나무는 단풍나무과(Aceraceae)로 역시 "나도"가 붙으면 같은 과(Family)가 아니다. 영어 이름을 보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다. 박달나무는 Iron Birch, 나도박달나무는 Three-flowered Maple이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고 견고하다보니 이름을 연결지은 것 같다.

박달나무는 목재상에서 구입하기 어렵지 않지만, 나도박달은 생산량이 작아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왼쪽이 박달나무, 오른쪽이 나도박달나무. 두 나무 모두 치밀하고 단단하다.


중국산 단풍이 즐비한 가운데 단풍나무중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나도박달나무(복자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기 때문. 단풍나무 중에서 유난히 색이 진해 조경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공해에 약하고 단풍빛은 매년 기온과 습도 등 조건에 따라 달라지므로 도시의 가로수로는 이용되지 않는다.


나도박달(복자기)의 단풍 (국립생물자원관)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몰라도 참 절묘하다.

나무 앞에 "너도"가 붙으면 같은 과(Family)지만, "나도"가 붙으면 비슷해도 다른 과(Family)임을 알 수 있었다. 외국 이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친근한 작명이다. 구별은 하되 너무 야박하지 않다.

이 글에서 살펴 본 목재중에는 너도밤나무 즉 비치(Beech)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 울릉도의 나무를 베어오는 것은 아니고 수입해 들여온다. 뒤틀림이나 수축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목재의 밝은 색감과 나뭇결, 단단하고 묵직함이 장점이고 같은 참나무과의 오크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많이 사용되고 있는 목재다.


수입하는 너도밤나무의 얀카지수와 12% MC 기건비중


너도밤나무는 친근한 이름에 비해 단단하고 무게도 적당하다. 얀카지수는 1,000이 넘고 무게도 0.71로 가볍지 않다. 하지만 특유의 밝은 색으로 무겁게 보이지는 않는다.

너도밤나무로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다 공방의 옆자리 회원이 독립해서 차린 CNC공방이 떠올랐다. 이 분은 업으로 목공을 한다. 주로 수제도마를 만들어 팔았는데 수익성이 마땅치 않아 공방에 앉아 같이 고민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CNC공방을 차렸고 지난 1년간 휴일없이 바빴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음료수 몇개 들고 응원차 방문해 구경하다가 이번엔 나도 대량생산(?)의 꿈을 안고 CNC에 맡겨보기로 한다.


목공 CNC (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로 제어되는 자동화 기계를 이용해 목재를 정밀하게 절삭, 조각, 천공(드릴링), 절단하는 공정. CAD(Computer-Aided Design)와 CAM(Computer-Aided Manufacturing)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설계 데이터를 기계에 입력하면, CNC 기계가 그에 따라 자동으로 목재를 가공.


CNC 공정으로 너도밤나무를 설계에 따라 재단하고 있다.


우리 공방장은 "CNC는 목공이 아니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일일히 수작업을 하는 목공에 비해 지나치게 수월해지기 때문에, "hand-made"라고 붙이기엔 곤란하긴 하다. 이른바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계가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개를 한꺼번에 만드는 경우에는 CNC의 월등함에 양보할 수 밖에 없다.

목공에서는 판재의 원장 사이즈를 2440×1220 (단위 mm)로 본다. 두께는 T를 붙이는데 24mm 두께를 24T라고 부른다. 사진속 너도밤나무 판재는 원장사이즈에 18T 다. 1장의 판재로 53개정도의 티트레이(tea-tray)가 만들어졌다. 물론 CNC 작업후에도 100여번 이상의 반복 노동이 필요하다. 주변부를 깍아내는 트리밍(trimming), 사포질하는 샌딩(Sanding), 레이저 각인(laser engraving), 오일링(Oiling) 등 가장 하기 싫은 반복작업이 남아있다. 물량이 많으니 반복작업은 더 인내심 테스트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또한 반복된다. "다시는 이걸 하지 않으리" 하지만 다음에 또 하게 된다. (이걸 중독이라는 하는걸까 싶다)


CNC로 재단이 끝난 것을 트리밍, 샌딩
레이저 각인, 오일링 단계를 거쳐 티트레이(Tea-tray)로 완성했다.


"너와 나"가 함께 시간을 갖는 도구를 생각해 티트레이를 만들어 보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같이 하면 좋겠다. 먼저 아내의 심리상담센터의 내담자 혹은 손님 맞이용으로, 30년 근무를 마치고 안식년에 들어가는 선배 선물용으로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간날 때마다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요즘 너무 덥다 ;;;)




언젠가부터 우리의 말속에 "다름"이 "틀림"으로 대체되고 있다.

"철수와 영희는 생각이 달라"라고 이야기 하는 대신 "철수와 영희는 생각이 틀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고, "나는 너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어"라고 말하는 대신 "난 너와 틀린 의견을 갖고 있어"라고 말한다. 이젠 이런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많아졌다.

반면에 "틀림"은 "다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정확히 “틀린 것”인데도 “다른 것”이라고 말해 문제를 흐리는 것인데 대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회피거나 감정적 갈등을 피하려는 중립적 자세에서 나온다.


철수 : 피카소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잖아.

영희 : (놀라며) 그건 틀렸어, 20세기 사람이야.

철수 : 아~ 그냥 내가 다르게 알고 있었네.


다름(different)와 틀림(wrong)을 혼용 혹은 오용하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웃어넘길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 하는 경우'는 자신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자기합리화의 심리가,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경우'는 타인 통제를 통한 자기중심적 심리가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나와 남을 구분하는 나의 원(Circle) 테두리를 굵고 진하게 그리려는 방어기제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사진은 1961년 급작스레 도시를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에서 서베를린의 가족이 동베를린에 있는 부모에게 손주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독에서 군을 동원해 45km남짓 가량의 길이에 ‘벽’을 쌓아올리면서 가족, 연인 등등이 느닷없이 생이별하게 된 것이다. 이후 2년간의 완전봉쇄후 63년 크리스마스기간(12.20~1.5)동안 서독사람들이 하루통행권으로 동독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속 장벽이 그은 선이 늘 마음에 많이 남는다.


사람들은 참 선을 긋고 분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더 선명하고 더 강하게 그을수록 열광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 아닐까 싶은 적도 있었다. 심한 경우는 내가 속한 부분을 ‘선’으로, 반대편을 ‘악’으로 강렬하게 구분한다.


굵고 진하게 원을 그리고 원 밖의 사람들을 혐오하면서 지낼 필요가 있을까? 좀 다르면 다른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너도 가족"이야, "너도 인간"이야 하면서... 선을 긋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능하면 굵은 대신에 얇게, 진한 대신에 연하게 혹은 구멍이 송송 난 원이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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