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함과 약함에 대하여
나무는 싹을 틔우고 나면 앞뒤좌우로 몸을 흔들며 하늘방향으로 성장을 열심히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기간이 있다. 신나서 뛰어오르다 세상의 거친 맛을 본 아이가 깜짝 놀라,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느라 외적 성장을 멈추고 내적 성장에만 몰입하는 시기다. 이때를 유형기(幼形期)(Juvenile period)라고 하는데 높이보다 (뿌리 쪽의) 깊이에 힘쓰게 되는 시기로 이 때는 아직 꽃이 피지 않는다. 마치 미성년이라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처럼...
유형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나무마다 기간이 다르다. 성질 급한 녀석은 3~5년 정도지만 착실히 준비하는 녀석은 30~40년이나 걸린다. 성질 급한 녀석들이 소나무 종류고, 20년 이상 걸리는 느긋한(?) 녀석이 참나무, 가문비나무 등이다. 너도밤나무는 30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내적으로 다지고 또 다지고 나서야 나무는 다시 하늘로 향한다.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에게도 유형기가 필요하다. 또 사람마다 유형기의 길이도 다를 것이다. 사람도 내적 성장의 시기를 건강하게 잘 보내야 사회 속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축적한 힘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끝없는 경쟁에 너무도 빠르기만 한 사회는 저마다 다른 유형기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숲이 모든 나무에게 빠른 유형기만을 강요했다면 한 두 종류들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숲을 의지해 살아가는 동물들도 많이 줄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숲을 '죽음의 숲'이라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다행히 숲은 나무들에게 제각각의 유형기를 허락했다.
나는 나무를 치료하고 살리는 '나무 의사'쪽은 아니다. 벌목해 죽은 나무를 손질하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나무 장의사'쪽이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나무를 보는 시각과 목재가 된 나무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공은 죽은 나무를 새롭게 살리는 작업이다. (나무에게 입장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재가 되어 사라질 뻔 한 나무를 가구나 공예나 건축에 쓰여 제2의 생명을 만든다.
목재를 다뤄보지 않은 사람들은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바늘잎나무)가 단단한 나무일 거라 생각한다. 추운 지방에서 살아남는 데다 사철 푸르다는 사실에서 강인함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특히 쭉쭉 뻗은 높은 전나무나 가문비나무를 보면 확신에 이른다.
하지만 반대다. 사철 푸른 침엽수는 대개 부드럽고 경도가 약한 나무들이다. 적도 쪽의 더운 지방으로 갈수록 단단한 나무들이 많아진다. 경도가 높은 나무들은 대부분 활엽수다.
목재는 크게 하드우드(hardwood)와 소프트우드(softwood)로 나뉜다. 직관적으로 '단단함'을 기준으로 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식물학적 분류다.
하드우드는 활엽수, 즉 넓은 잎 나무에서 얻은 목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꽃이 피고 열매 속에 씨앗이 들어 있다. 하드우드는 대개 성장 속도가 느리며,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한 편이라 내구성이 뛰어나다. 가구나 마루재, 악기와 같은 고급 제품에 많이 사용된다. 참나무(Oak), 단풍나무(Maple), 호두나무(Walnut), 벚나무(Cherry) 등이 하드우드다.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아 장식적 가치가 높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비싸다.
반면 소프트우드는 침엽수에서 나오는 목재로, 바늘잎나무에서 얻어진다. 대부분 겉씨식물(Gymnosperms)로, 씨앗이 열매 없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소프트우드는 일반적으로 성장 속도가 빠른 속성수가 많고 조직이 성글며 가공이 쉬운 편이다. 구조재, 건축 자재, 종이 원료 등으로 널리 쓰이며, 생산량이 많아 가격도 저렴하다. 소나무(Pine), 전나무(Fir), 가문비나무(Spruce), 측백나무(Cypress) 등이다.
하지만 하드우드가 항상 단단하고 소프트우드가 항상 부드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혼선이 있다. 예외가 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드우드(hardwood)는 '단단한 나무'가 아니라 '활엽수'로 번역되고, 소프트우드(softwood)는 '부드러운 나무'가 아니라 '침엽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서 단어가 좀 이상하지만 오동나무, 발사나무처럼 '소프트한 하드우드'(Soft hardwood)도 있고, (상대적으로) '하드 한 소프트우드'(Hard softwood)도 있다.
원래 활엽수는 broad-leaved tree, 침엽수를 needleaf tree 혹은 conifer tree라고 불러야겠지만 복잡하니 쉬운 소통을 위해 하드와 소프트로 퉁친 것 아닐까 싶다. 예외 몇 개만 모른 척하면 '활엽수는 단단하고, 침엽수는 무르다'로 단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에서 침엽수는 Radiata Pine(뉴송)과 Spruce(가문비나무)로 얀카지수가 1,000 이하의 파운드포스를 보여 무른 나무임을 알 수 있다.
메이플(단풍나무)과 오크(참나무), 체리(벚나무), 월넛(호두나무)은 1,000을 넘기고 있는 단단한 하드우드다. 다만 활엽수중에 오동나무나 발사나무는 엄청나게 무르고 가벼워 예외적이다. 전 세계 거래되고 있는 목재 중에 가장 약한 나무들인데도 활엽수라 하드우드에 속한다. 그래서 '매~~ 우~~~ 소프트한 하드우드'가 된다. (얀카지수에 대해서는 04화 소낙비 내리는 날에 소개되어 있다)
주변에서 종종 보이는(스타벅스 커피숍 큰 테이블에 자주 보인다) '라디에타 파인'(Pinus radiata)은 국내에서는 주로 뉴송으로 불린다. 원래는 북미 태평양 연안의 자생수종인데 뉴질랜드, 칠레, 호주 등에서 도입해 식재에 성공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는데 1㎝이상의 넓은 나이테 폭이 특징이다. '뉴송'은 '뉴질랜드 소나무'라는 뜻으로 주로 뉴질랜드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입한 소나무가 '미송'이고, 칠레에서 수입한 것은 '칠레송', 한때 소련에서 수입한 것은 "쏘송'이라 불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결혼할 때 그 나무로 장을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 결혼시기가 빨랐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빨리 자라는 나무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년에 1∼2.5m씩 자라며 6~7년이면 지름이 20∼25㎝에 달하는 등 생장이 무척 빠르다. 10년이면 목재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오동나무로 짠 전통장은 무척 가벼워 묵직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서질까 걱정될 정도다.
나는 작은 가구나 공예품을 만드는 소목(小木)이다.
만드는 가구도 긴 쪽이 1200mm가 최대다. 내 승용차의 뒷좌석이나 트렁크에 실리는 최대 사이즈가 1200mm이기 때문이다. 더 긴 사이즈가 필요한 경우에는 1200mm씩 여러 개로 나누어 제작한다. 1200mm가 넘는 길이를 만들게 되면 이동시킬 때마다 운송료가 따로 들기 때문.
내가 주로 좋아하게 된 나무는 주로 단단한 나무(하드 한 하드우드)들이다.
주로 소품이나 가구를 만들기 때문에 크기 대신 단단함을 선택하게 된다. 치밀하고 단단하지만 손끝에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감촉이 참 좋다. 높은 밀도와 함께 비정형의 무늬도 한몫 거든다. 단점은 비싸다는 것과 단단해 목공작업하기 힘들다는 점. 박달나무, 단풍나무는 특별한 무늬가 없어도 '은은한 치밀함'에 기분이 좋았고, 올리브나무나 유창목은 '신비로운 무늬'에 매력을 느꼈다.
반면, 소프트우드 쪽으로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특히 소나무류의 듬성듬성한 무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소프트우드 계열은 가구재로도 쓰이지만 많은 용도는 건축재다. 저렴한 편으로 많은 양을 사용할 때 유리하다. 나의 경우는 부피가 큰 책장을 만들 때 정도만 종종 사용했다.
그렇게 소목(小木)인 나에게 '단단한 하드우드'(Hard hardwood)는 사랑이었고 '부드러운 소프트우드'(Soft softwood)는 무관심이었다. 그런데 나이들어 가면서 이젠 약한 소프트우드에도 관심이 생긴다. 나무를 중심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조금씩 소프트우드에게도 눈길이 간다. 과연 소프트우드는 나의 하드우드 편애를 바꿀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아내가 보는 드라마를 옆에서 보다가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후에는 심지어 쇼츠를 보다가도 흐르고 어떨 때는 사진 한 장에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의사결정도 느려진 것 같다. 신중해진 것인지 우유부단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은 미루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복잡한 일들이 몰려오면 먼저 우선순위를 정했고,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은 바로 배제해 왔다. 바꿀 수 없는 것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자주 했던 말이 "약속에 늦었다고 버스 안에서 뛰지 말자"였던 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나무를 하드우드와 소프트우드로 나눈 것처럼, 20세기엔 남자를 "싸나이"와 "기생오라비"로 나누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육식남"과 "초식남'으로 나뉘더니 최근엔 "테토남"과 "에겐남"으로 나눈단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에서 따온 말로 <적극성, 직진성, 추진력> 같은 걸 가진 사람을 '테토 타입', 반대로 <섬세함, 감성, 배려심>이 많은 사람을 '에겐 타입'으로 분류한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혈액형 같은 분류놀이지만, 난 생긴 것은 살짝 '기생오라비'쪽, 행동은 '테토남'에 가까웠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훌쩍훌쩍 '에겐化' 되고 있다. 물론 여성도 '테토녀'와 '에겐녀'로 분류된다.
남성이 우는 횟수가 여성의 1/5 정도 수준(성인 남성은 월 1.4회, 여성은 3.5회 운다)으로 잘 울지 않아 남성의 평균수명이 짧다는 말도 들린다. '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해서' 울음을 참는 것은 건강에 나쁘고 감정에 복받쳐 흘리는 눈물은 스트레스로 생긴 나쁜 물질을 몸 밖으로 배출한다고 한다. 나는 뒤늦게 수명 늘리기 작업 중인가 보다.
실제로 영국에선 ‘다이아나 효과(Diana effect)’라는 말이 있는데, 1997년 영국 왕세자비 다이아나의 장례식이 있던 날 수많은 영국인들이 눈물을 흘렸고 이후 한 달 동안 영국 내의 정신병원이나 상담소를 찾는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이 효과에 따르면 난 나이 50이 넘으면서 건강해지고 있다. 중년이 넘어 잦아진 눈물은 결국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나 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프트우드는 주로 건축재로, 비싼 가격의 하드우드는 주로 가구재나 소품재로 쓰이지만, 간혹 부유한 집에서는 인테리어 내장재 등으로 비싼 하드우드를 쓰는 경우가 있다. 같은 가격이었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하드우드를 건축재, 가구재 등 용도 가리지 않고 주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추정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강하고 단단한 나무를 선호한다. 문득 단단한 나무들만 쌓여있는 나의 공방 적재함을 보다가 떠올린다. 우리가 "강함"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들춰본다.
고대 인류에게 "강함"의 상징은 "강한 왕"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왕을 신으로 숭배하다가 그가 약해지면 살해하는 이른바 ‘왕 살해’ 풍습이 세계 곳곳에 있었다.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약한" 왕이 아니라 "강력한" 왕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고대 인류는 "대상의 상반된 모습을 하나로 통합하는 인식이 성숙하지 못한 단계"였다고 했다. 실제로 아기는 화난 엄마와 다정한 엄마를 동일한 엄마로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가 있다. 그때 아기는 화난 엄마와 다정한 엄마를 서로 다른 존재로 분리해 인식한다. 동화 속 친엄마와 계모 프레임은 같은 엄마를 다른 두 존재로 분리인식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고대인류는 힘 있는 왕을 ‘전적으로 좋은 대상’으로, 약해진 왕을 ‘전적으로 나쁜 대상’으로 별개의 대상으로 여기고 약해진 왕은 제거하게 된다.
이것은 고대 인류부터 잠재된 심리적 생존술이다. 자신의 생존을 가장 힘 있는 대상(강력한 왕)에게 ‘맡기고 숭배하다가’, 나쁜 기운은 희생양(약해진 왕)에게 ‘떠넘겨’ 제거함으로써 다시 생존을 보장받는 방식이다. 고대 인류의 이러한 방어기제는 현재도 자주 나타난다. 극심한 정치분열과 혼란의 상황에서 이러한 동일시, 분열과 투사의 심리는 꽤 자주 발현된다.
지금의 '건강한' 시각으로는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의 고대 인류의 정신성을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강박신경증적 증상, 클라인(Melanie Klein)은 경계선/편집증적 인격 증상, 융(Carl Jung)은 정신분열증적 증상으로 제각각 현대의 정신증과 연결 지었다. 이토록 "강함"에 대한 이끌림은 생존을 위해 내재된 우리의 강박이거나 편집증적이거나 정신분열적 본능일지 모른다.
동일시 (Identification)
다른 사람의 특성이나 행동을 자기 것으로 삼아 닮으려는 무의식적 심리
예: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부모나 선생님의 말투나 행동을 모방함.
분열 (Splitting)
대상을 '전적으로 좋은 것'과 '전적으로 나쁜 것'으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인식하는 방식.
예: 어떤 사람을 처음엔 완벽하다고 생각하다가, 실망한 후엔 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여김
투사 (Projection)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나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 그 사람이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
예: 자신이 누군가를 싫어하면서, 오히려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끼는 경우.
문제는 강함에 대한 숭배가 높아질수록, 약함에 대한 혐오도 깊어진다는 점이다. 생존의 위협을 느낄수록 강함을 찾아 헤매는 노력과 함께, 약자를 찾아내 혐오하려는 경향도 높아진다.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대표적인 약자 혐오는 15세기말에 시작해서 17세기까지 이르는 마녀사냥(Witch Hunt)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은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에 벌어진 일로 알고 있지만 오히려 르네상스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다. 르네상스에 대한 백래시(backlash)로 일어난 약자혐오다.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같은 도시에서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것은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양쪽 모두였다. 대중들에게 마녀만 제거하면 과거와 같이 평온해질 것이라고 교회와 세속권력이 합작으로 퍼트린 "프레임 전쟁"이었던 것이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혐의를 가리는 동안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자기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고문 도구 대여, 고문기술자 급여, 재판 비용, 체포 비용, 화형 집행비, 교황에게 내는 마녀세 등을 마녀 용의자가 모두 지불했다. 화형에 처해진 후 추가로 내려지는 벌이 '전재산몰수'형이었기 때문에 당시 돈은 많지만 (남성보호자가 없는) 과부가 가장 약한 타깃이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최대 50만 명의 마녀(?)가 처형되었다고 하니 당시 인간의 집단 히스테리가 참 무섭다.
여기서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가톨릭교회가 오히려 약해졌을 때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만적 행위는 생존의 위기가 닥쳤음을 보여주는 병적 증상'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에 지나치게 강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겁먹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 세계에 고르게 나타난 "왕 살해" 풍습과 르네상스 이후 "마녀사냥"은 강함을 숭배하는 자들의 겁먹은 모습이다.
진정한 강함(Strong)은 단단하고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not hard) 부드럽고 유연하다 (but soft). 사나운 행동은 권력이 아니라 무력하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다큐, 심지어 쇼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된 나는 단단한 하드우드가 아닌 가장 소프트한 나무를 찾아보기로 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목재 중에 세상에서 가장 소프트한 나무 Top5를 뽑아본다. 기준은 얀카지수를 따른다.
재밌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목재중 1위, 2위, 3위가 침엽수인 소프트우드가 아니라 활엽수로 하드우드라는 점이다. 매우 매우 매우 소프트한 하드우드(very very very soft hardwood)다.
목재로 거래되는 나무 중 세상에서 가장 소프트한 나무는 발사나무(Balsa)로 얀카지수를 보면 상상이상으로 약하다. 나는 1,000 이상이면 꽤 단단한 나무라고 본다. 그런데 67이라니... 세상에... 가장 소프트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다른 침엽수들처럼 건축자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모형제작을 하는 목재로 자주 쓰이고 부드러운 만큼 충격흡수도 잘하는 편이라 고가의 전자제품 포장재로도 쓰인다.
그 외 소프트한 나무는 주로 전나무, 가문비나무와 잣나무를 포함하는 소나무류, 포플러와 사시나무를 포함하는 버드나무류, 그리고 삼나무류가 대표적으로 대부분 얀카지수가 300~600 이하에 머무른다. 목조주택이 많은 북미에서 'SPF'로 표기되어 수입되는 구조부재가 있다. 구조부재는 토대, 기둥, 보 등을 만드는 자재로 SPF가 의미하는 것은 Spruce(가문비나무류), Pine(소나무류), Fir(전나무류)의 첫 글자로 목조주택에 필요한 기계적 성질과 허용응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섞어 사용한다. 주택을 위한 소프트우드 3형제다.
소프트한 나무는 진동을 잘 울려주거나 충격을 흡수하는 장점이 있어 고급악기의 상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알프스 지방의 가문비나무는 명품 바이올린의 상판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선 '독일가문비나무'라고 부르는 European Spruce와 같은 나무지만, 고급 브랜딩을 위해 알파인 스프러스(Alpine spruce)라 따로 이름을 붙였다. 최고의 바이올린 브랜드 스트라디바리, 과리넬리에 쓰인 스프러스는 이탈리아 북부 발 디 피엠(Val Di Fiemme) 계곡의 스프러스라고 또 한 번의 브랜딩을 한다.
알프스산맥은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6개 국가가 붙어 있다. 그중에서도 바이올린에는 이탈리아 쪽의 스프러스를 최고라고 하는데 나는 이 또한 마케팅 효과 아닌지 의심한다. 이러한 스토리는 저렴한 목재인 가문비나무(스프러스)를 값비싼 목재로 변신하게 만든다.
난 '가문비'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검은 비"(Black rain)인 줄 알고, 이름이 멋지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어둑어둑한 가문비나무 숲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풍경을 상상하고 "오~~~ 검은 비"했다. 아마도 당시 봤던 음산한 유럽영화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완전한 착각이다.
가문비나무의 어원은 '감은 비皮나무'가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즉 '검은 껍질 나무'라는 뜻으로 흑피목(黑皮木)이라 한다. 검은피나무라 부르다가 지금에 와서 가문비나무가 된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나 혼자 했던 낭만적 해석은 땅에 떨어졌다.
이번엔 단단하지 않은 나무로 집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집안을 돌아보니 빈자리도 없고 필요해 보이는 가구도 없어 보인다. 한참을 '없는 수요' 창출을 위해 찾아 헤매다 결국 집이 아닌, 아내가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의 한쪽 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눈치를 살핀다. 아내도 공간을 차지해 들어오는 물건에 경계심을 갖고 있어, 슬쩍슬쩍 며칠을 두고 운을 뗀다.
"저쪽 구석에 조그마한 책장 하나 있어도 좋지 않을까?"
아내가 눈치를 챘는지 "아니. 저긴 비어있는 게 좋아"라며 단호하게 대답한다.
일단 후퇴하고 며칠을 더 운을 뗀다. 수차례 반복된 질문에 "글쎄?"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때다!!!! 시작할 타이밍
과제는 1) 공간을 최소한으로 차지해야 한다는 것 2) 단단하지 않은 나무 3) 나무의 색감이 이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 급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내의 마음이 다시 단호해지기 전에...
목재를 찾아보다가 라왕(Lauan)을 선택했다. 목공을 시작해서 써보지 않은 목재 중에 골랐다.
50대 중년들에게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다닐 때 복도와 교실의 바닥재로 친숙한 목재다. 교실에서 떠들다 벌로 청소하면서 복도마루에 초를 문질러 닦던 기억이 있다. 라왕이 국내에서 사용되다가 조금 더 견고하면서도 가격이 조금 더 싼 고무나무에 밀려 많이 대체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옛날만큼은 아닌 듯하다. 추억이라면 추억이랄까 오랜만에 듣는 이름 라왕을 선택하게 되었다.
조금 더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 라왕 '조각 집성목'을 선택했다. 사이드핑거(side-finger) 집성목으로... 목재를 넓은 판재로 만들 때 판재끼리 붙이는 "집성"을 하게 되는데, 크게 3가지 방식이 있다. 같은 나무여도 그 중 솔리드집성이 제일 비싸다. 사이트핑거 집성과 탑핑거 집성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나무판끼리 붙여놓은 집성목을 보면 접합 부분에 손가락 깍지 낀 것처럼 파내, 붙인 모양을 볼 수 있다.
1) 솔리드(Solid) 집성
동일한 길이와 두께의 판재들을 나란히 접착하여 하나의 넓은 판재로 만드는 방식
2) 사이드핑거(Side-finger) 집성
여러 조각의 목재를 옆면(측면)에 톱니 모양의 핑거 접합(finger joint)해 결합하는 방식
3) 탑핑거(Top-finger) 집성
여러 조각의 목재를 위와 아래면에 톱니 모양의 핑거 접합(finger joint)해 결합하는 방식
우리나라에서는 라왕(Lauan)으로 부르지만, 외국에서는 합판으로 쓰일 때 라왕으로 불리는 것과 구별해 메란티(Meranti)라고도 부른다. 특이한 것은 라왕이 한 가지 수종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남아 열대지방의 활엽수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실제로 서로 다른 나무들이 뒤섞여 그냥 라왕이라고 부르는 다소 루즈한 명칭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섞이다 보니 라왕은 밝은 연갈색부터 붉은 갈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보이고, 무늬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가벼운 편이지만 강도는 중간 정도(얀카지수 500~800)며 가성비가 좋고, 가공이 쉬운 이른바 다재다능 목재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산 라왕으로 박스형 책장을 만들기로 했다. 확실히 집성되어 있는 조각들의 색깔이 제각각이다. 라왕은 '필리핀 마호가니'라고도 불리는데 실제 마호가니와는 전혀 다른 나무다. 최고급 가구재에 속하는 마호가니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인 것은 당연히 값을 높이려는 마케팅 목적일 테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의 마호가니'라 칭하는 나무가 있다. 색이 붉고 결이 멋진 참죽나무의 별명이다. 하지만 이 역시 전혀 다른 나무다. 이렇게 목재 쪽에는 마케팅이 만들어낸 혼선이 꽤 있다.
급하게 책장을 하루 안에 만들어 상담센터 구석에 빨리 배치해야 한다. "글쎄?"에서 "비어있는 것이 좋겠어"로 돌아가기 전에 완료해야 한다. 구조도 제일 단순하게, 평소에 잘 안 쓰던 나사를 써서 시간을 단축하고, 오일을 바른 후 마르지도 않은 채 상담실로 들고 왔다. 마치 007 작전처럼...
오일을 칠하고 나니 나무의 색이 올라온다. 생각보다 이쁘게 올라오는 것 같다. 앞으로 라왕을 자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확실히 고무나무보다는 내 취향에 더 맞는 것 같다. 굳이 필리핀 마호가니라고 불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구석 제일 적은 공간에 3단으로 쌓으면 되는 박스형 책장으로 주차장에서 한 번에 들고 오지 못해 몇 번 왕복했지만 배치하고 나니 단순하지만 꽤 마음에 든다. 아내도 보더니 흔쾌히 좋다고 한다. 예의상 해주는 대답일 수도 있지만 하루짜리 007 작전은 아마도 성공한 듯하다.
단단하지 않은 나무를 돌아보면서 든 생각은 나무도 사람도 유형기를 잘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숲이 받아주고 있어 제각각 차이나는 유형기를 잘 보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기간 안에 유형기를 마치고 성과까지 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잘 받아주지 않는다. 과연 우리 사회는 숲보다 발전한 것일까?
누구는 소나무처럼 빠르지만 누구는 너도밤나무처럼 느리다. 사회 속으로 느리게 들어가는 20대 젊은이들과, 사회밖으로를 준비하며 약해져 가는 50대 이상의 중년에게 한국 사회는 과연 생명의 숲이 될 수 있을까?
나무에게 제2의 생명을 주고 있다고 믿었던 '나무 장의사'는 나무가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나무는 넉넉하게 받아주는 숲이 있어서...
나도 그동안 외면했던 "부드럽고 약한 나무"들에게도 관심을 두기로 했다. 난 이제 '소프트한 남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