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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첫날

최초냐, 최고냐, 그것이 문제로다

by 도시 나무꾼 안톤

인생은 숱한 "첫날"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기억에 없지만 반세기 전 가을 세상에 나온 첫날, '엄마'라는 말을 처음 해 부모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날, 왼쪽 가슴에 큼지막한 이름표 붙이고 '국민'학교에 처음 간 날, 훈련소 앞에서 망설이고 서성였던 군 입대 첫날, 처음 연애시작한 날, 또 처음 헤어진 날, 직장 첫 출근날, 아들이 태어난 날 등등으로 시작하는 수 없는 챕터가 떠오른다. 인생의 책 마지막 챕터는 '처음 죽는 날'이겠지만...

돌아보면 큼지막한 챕터도 있고, 나에게만 의미 있을 것 같은 작은 챕터도 있다. 어떻게 챕터를 나눌지는 자기만의 몫이다. 이젠 '커다란 처음'보다, 잘게 쪼개어진 '작은 처음'에 더 눈길이 간다. 50년 이상을 투자한 후 간신히 얻어 낸 지혜 같은 것이랄까.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젊을 때는 인상적이고 커다란 일에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이제 제일 부러운 사람은 '작은 일에 크게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작은 일, 큰 기쁨'으로 챕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작을수록 모든 날이 "첫날"이 되고 모든 일이 두근 두근대는 일이 된다. 오늘은 거대한 처음을 작디작은 처음으로 끌어내리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




'최초'(the first)와 '최고'(the best) 중에 고르라면 사람들은 무엇을 고를까?


아마도 대부분 '최고'를 고를 것이다. "최고의 영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최초가 없는 최고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를 인정하는 분야에서는 그 최초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최고를 만들지 못한 수없이 많은 최초들도 있었다. 최고가 되지 못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수많은 '최초'들은 들판의 잡초처럼 잊혀졌다.


최초를 담당하는 '물길을 낸 자'최고를 담당하는 '꽃을 피우는 자'로 나뉜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처음 물길을 낸 사람’과 ‘꽃을 피우는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가 꽤 많다는 점이다. 물길을 내는 작업은 구질서에 대한 도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몰인정과 비난을 버티는 자기만족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한 명의 개인이 ‘시작’과 ‘번성’을 모두 감당하기엔 버겁기도 하거니와 ‘시작’이 ‘번성’에까지 이르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인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선 이가 ‘물길을 내는’ 역할이라면 뒤에 선 이가 ‘꽃을 피우는’ 역할이다. 한 명의 개인이 운 좋게 두 역할을 모두 맡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두 개의 역할은 각각 두 사람에 의해 대개 나뉘어진다.


난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이름도 비슷한 마네(Manet)와 모네(Monet)다.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모네는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와 개척자가 어떻게 다르길래 이렇게 별명이 붙여졌을까? 마네가 단지 모네보다 8살 많은 형이라서 붙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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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에두아르 마네(Manet), 오른쪽이 클로드 모네(Monet)


19세기 중반, 규격과 균형, 전통과 신화를 중시하는 아카데미 미술의 살롱전이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살롱(Salon)전에 입상하거나 회원이 되지 못하면 돈을 벌지 못해 힘들게 화가생활을 해야 했던 상황이다.

이때 살롱전 중심의 화풍에 반기를 드는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그중에 걸출한 화가, 마네(Manet)가 있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발표하자 살롱전 중심의 미술계는 발칵 뒤집힌다. 신화 속 여신이 아니고 실존인물을 누드로 표현했는데 이 당시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네의 그림은 전시장에서 다른 그림보다 높은 자리에 걸렸다고 한다. 다른 그림보다 우월해서 갤러리에서 특별대우를 한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우산이나 지팡이로 그림을 찢어 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네는 이러한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더 나아가 2년 뒤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나체의 창부를 그린 <올랭피아>를 발표한다. 물론 <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훨씬 더 큰 분노를 사게 되었음은 불 보듯 뻔했다.


20250623-10064064.jpeg 올랭피아(Olympia). 에두아르 마네(Manet), 1865년


지금 보면 파격적인 느낌을 받기 어렵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은 난리가 났다. 먼저 그림의 주인공이 여신이나 요정이 아닌 현실의 매춘부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카데미 미술에서 여성의 누드는 여신이나 요정일 경우라는 전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올랭피아>는 현실의 매춘부를 그린 것이다. 당시에 '올랭피아'는 매춘부의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지 미화되지 않은 나체도 문제였다. 여신이나 요정이면 신비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나 천사가 함께하는 등의 장식이 필요했는데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아카데미 미술

국가의 권위하에 형성된 전통적이고 이상주의 예술 양식.
프랑스 국립미술아카데미(Académie des Beaux-Arts)와 파리 국립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 전시회인 살롱(Salon)을 중심으로 발전.
고전 고대의 미학을 바탕으로, 신화, 종교, 역사와 같은 이야기들이 주된 소재였으며, 인간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도덕성과 영웅주의를 강조하는 경향.


난 마네의 이러한 행동에 희열을 느낀다. 구질서에 대한 도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관심을 가져온 또 하나의 르네상스이자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는 "물길을 내는 고집"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아카데미 미술의 정점을 이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같은 작가의 그림이 마네의 그림보다 훨씬 관능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벗은 몸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을 신화 속 여신이나 요정으로 우회적으로 순화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마네가 아카데미 미술의 '우회적인 옷' 하나까지 마저 벗겨버리자 감정적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마네의 유명세가 높아지자 당시 살롱전을 꼰대미술이라 비난하던 화가들이 마네 형님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빛의 화가’로 알려진 모네(Monet)다. 다행히 마네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어서 몰려든 가난한 화가들에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모네는 마네형님과 친분을 유지하다가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한 그림 중에 특히 <인상, 해돋이>가 미술계로부터 ‘제대로 그리지 않고 인상만 그린 그림’, ‘그리다 만 그림’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상만 그렸다'는 비난에서 ‘인상파’라는 말이 유래한다.


1872insang-haedoti.jpg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1974


재밌는 사실은 인상파 전시회에 마네는 출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형님동생’ 했을지언정 미술적으로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카데미 화풍에 반기를 들고 신에게서 인간으로, 신화적 질서에서 주관적 감성으로 변화하는 흐름으로는 같이 묶을 수 있겠지만, "인상주의"라는 스타일 측면에서는 적잖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혹자는 마네를 인상주의 화가로 넣기도 하고,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쯤에서 마네(Manet)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일컫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니, '아버지'란 단어가 절묘하다. 살짝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룹 Queen의 프레디 머큐리가 그의 아버지와는 음악적으로는 관계가 없듯이... 하지만 그 아버지가 없었다면 프레디 머큐리는 없었을 것처럼...


마네(Manet)를 최초를 담당하는 '물길을 낸 자'로, 모네(Monet)는 최고를 담당하는 '꽃을 피운 자'로 인식한다. 그래서 집안 거실에 걸 그림이라면 모네의 그림을 걸지만,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것은 마네의 전시회가 더 당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에서 보여준 고집에 인간적 매력과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네가 들판의 잡초처럼 사라진 그저 그런 '최초'가 아니어 참 다행이다. 난 이렇게 "최초"를 편애한다.




어느 기독교 국가에서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 누구의 직업이 가장 오래된 직업인지 가벼운 논쟁을 벌였다.

의사가 먼저 말하길 "하느님이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죠. 그게 뭘 하신 걸까요? 수술을 하신 겁니다. 의사야말로 가장 오래된 직업이죠"

그러자 건축가가 나섰다. "하느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수술이 아니라 혼돈의 상태에서 세상을 만드신 거죠. 그게 건축입니다. 건축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정치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혼돈의 상태는 그럼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장하준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 짧게 소개되는 일화다.

정치인이 만들었다는 혼돈의 태초에, 건축가가 했다는 하늘과 땅을 가르고 또 땅은 바다와 육지로 나누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끝내자, 하느님이 이브를 만드는 수술(?)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오히려 풀과 나무였다. (창세기 1장 11절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그럼에도 의사, 건축가, 정치인이 논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주목받지는 못한다. 나무의사도 없고 조경사도 없고 목수도 논쟁에 뛰어들지 못했지만 우리는 안다. 나무는 늘 신화의 처음에 있다는 것을...


서유럽의 신화세계는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알프스 남쪽의 그리스(로마) 신화와 알프스 북쪽의 북유럽(노르드) 신화가 그것인데, 신들이 질투하고 싸우고 모함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사람들도 북유럽 신화를 접하면 적잖이 당혹스러워한다. 많은 신이 등장하고 인간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유사하지만, 신들의 힘과 권력이 매우 약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격인 주신, 오딘(Odin)조차도 지혜를 얻기 위해 한참 아래 서열의 거인 미미르(Mimir)에게 한쪽 눈을 뽑아주고 나서야 지혜의 샘물을 마실 수 있었다던가, 여신 굴베이그(Gullweig)가 떠나버린 남편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면서도 그 여정에서 수많은 남성과 동침을 하고 그 대가로 황금목걸이 브리싱가멘(Brisingamen)을 받는다던가 이야기를 보면 확실히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한참 아래 신에게 신체 일부분을 지불하고 나서야 원하는 것을 얻거나, 헤라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북유럽은 신들 조차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최근 유명해진 토르(Thor)도 다혈질로 완전히 믿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로키(Loki)는 영리하지만 사악하고 늘 사고를 친다. 그리스 신들이 인간적이라면, 북유럽 신들은 그냥 인간 같다.


인간을 닮다가 인간이 돼버린 것 같은 북유럽의 신들은 모두 하나의 이그드라실(Yggdrasill)이라는 커다란 물푸레나무에 연결되어 있다. 땅 깊은 곳에서 한 그루의 물푸레나무가 솟아올라 하늘을 들어 올리며 세상이 열리며 우주목, 세계수(世界樹)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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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신화의 세계지도와 물푸레나무 (출처: West Fargo 시 홈페이지)


북유럽신화에서는 신, 거인, 인간의 세계가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에 연결되어 있다. 오딘, 토르, 로키 등이 살고 있는 신의 세계인 아스가르드(Asgard)와 인간, 거인, 요정 등이 살고 있는 미드가르드(Midgard), 죽은 자의 세계인 니플헤임(Niflheim)에 뿌리를 대고 있다. 뿌리를 대고 있는 곳마다 샘(spring)이나 우물(well)이 있어 나무에 생명을 넣어주고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Yggdrasill)은 다시 세상을 지탱해주고 있다.


그런데 왜 북유럽은 신화의 중심에 다른 나무가 아닌 물푸레나무를 놓게 된 것일까? 물푸레나무는 유럽전역에 퍼져있는 비교적 흔하면서 친근해 '숲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속 계곡 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물푸레'라는 이름은 물에 담가놓으면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수청목(水靑木)이라 한다.

거의 모든 종류의 토양에서 잘 견디며 단단하면서 질기고 탄성이 좋다. 영어 이름 애쉬(ash)는 지금의 뜻인 '재'가 아니라 고대영어 애시(aesc)에서 온 것으로 '창'(spear)을 뜻한다. 흔하면서도 단단하고 탄성이 좋아 예로부터 주로 창을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에 관한 책 <일리어드>에 따르면, 그리스의 전쟁 영웅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공격하기 위해 들고나간 창이 물푸레나무 창이다. 그 외에 어떤 표적이든 던지면 스스로 알아서 무조건 맞히는 오딘(Odin)의 창인 궁니르(Gungnir)도 물푸레나무로 만든 것이다. 거친 기후의 북유럽에서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상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매우 소중한 나무였고 그래서 당당히 신화에서 온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의 위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물푸레과 느릅


물푸레나무는 세상을 지탱하기도 하지만 인간들로 세상을 채우기도 했다.

북유럽신화에서 인간을 만든 것은 오딘(Odin) 삼 형제다. 오딘은 빌리(Vili)와 베(Ve)라는 두 동생이 있었다. 삼 형제가 거인 이미르(Yimir)를 죽여 그 몸으로 세상을 만드는데, 이미르의 피로 만든 바다에서 물에 떠있는 두 개의 통나무를 발견한다. 하나는 물푸레나무(askr)고 또 다른 하나는 느릅나무(embra)였다.

그들은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들고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어, 오딘이 호흡과 생명을, 빌리는 지성과 힘을, 베는 성기와 형상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의 이름은 나무의 이름을 따 아스크(Ask)와 엠블라(Embla)로 기독교의 아담과 이브다.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기독교에 비해, 독립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창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흙으로 빚은 이야기를 가진 메소포타미아 지방(엔키가 흙을 빚어 만든 수메르신화와 야훼가 흙은 빚어 만든 기독교)보다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북유럽 지방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지역마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 많은 나무 중에서도 물푸레나무(Ash)와 느릅나무(Elm)가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Sölvesborg_Ask_och_Embla2.jpg 스웨덴 Sölvesborg의 시청광장 Ask와 Embla 동상
ash_elm.jpg 유럽의 구주물푸레나무(European Ash)와 느릅나무(Durch Elm)의 얀카지수와 비중(12% MC)


구주물푸레나무라고 불리는 유럽의 물푸레나무는 얀카지수가 1,480으로 꽤 단단하다. (1,000 이상이면 꽤 단단) 많이 무겁지는 않아서 무게에 비해 강도가 높고 탄성이 있으며 질기다. (강도와 무게는 우리나라 느티나무 Zelkova와 비슷하다) 반면 느릅나무(Elm)는 얀카지수가 1,000이 넘는 단단한 북미 쪽 나무가 있는 반면, 유럽 쪽 느릅나무는 1,000 아래에 포진해 상대적으로 무르다. 그래서 신체특성상(?) 물푸레남과 느릅녀로 나눈 것으로 추정해 본다.


한국의 물푸레나무는...


물푸레나무의 단단하고 질긴 특성은 형벌로도 연결된다. 조선시대 곤장은 주로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졌다. 물푸레나무 곤장으로 맞으면 부상자가 속출해, 한때 덜 아픈 버드나무나 가죽나무로 바꿨더니 좀 과장인 것 같지만 죄인들이 자백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조선 예종 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곤장을 다시 물푸레나무로 바꾸어달라고 상소를 올리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한때 야구배트의 주재료가 물푸레나무였다고 하니 적당한 탄성과 무게, 단단한 강도는 휘두르기에 적합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에서는 수청목공사(水靑木公事)라 하여 물푸레나무 공문’이란 말이 나오는데 고려 우왕 때 관리들이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출두하라는 공문을 발송하고, 출두하고 나면 물푸레나무로 덮어놓고 곤장질해 재산을 강탈하던 것을 빗댄 말이다. 중세 말기 돈 많은 여성을 마녀로 몰아 사냥하고 재산을 강탈했던 유럽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한국의 물푸레나무(Korean Ash)는 유럽의 물푸레나무인 구주물푸레나무(Common Ash, European Ash)보다 비중이 살짝 더 높고 더 단단해 더 아팠을 것 같다. 나무껍질에 흰점이 얼룩져 있어서 백심목(白尋木)이라고도 불리는데 계곡 주변에서 이런 나무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PC_20201110160446_KZHMBVIZEG.jpg 우리나라의 물푸레나무(Korean Ash) 출처 : 국립생물자원관




어느 날, 공방장이 지인의 주문을 받아 TV장을 만들고 있었다.

오일마감 후 건조하고 있는 상태를 슬쩍 지나치듯 본 나는 "이거 소나무인가요?"라고 물어봤다. "아.. 그리 보이나? 이건 애쉬(물푸레나무)야"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본 기억이 있다.

미국산 물푸레나무(White Ash)의 경우는 얼핏 보면 소나무와 헷갈릴 수 있다. 깜짝 놀라긴 공방장도 마찬가지였다. 정성 들여 물푸레나무로 만들어놨더니 더 저렴한 소나무로 오해를 받았으니 당황했을 법도 하다. 주문한 지인이 나처럼 오해하면 안 될 테니까... 25년 7월 현재 같은 부피의 집성목이라면 물푸레나무가 뉴송(뉴질랜드산 소나무)에 비해 약 3배 비싸다.


KakaoTalk_20240212_083324546.jpg 물푸레나무 (Ash)


나무적재함에서 물푸레나무를 꺼내온다. 내가 가진 물푸레나무는 소나무 같아 보이진 않는다. 심재(心材) 쪽에 가까워서 그런지, 특징적인 나뭇결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나이테가 훨씬 촘촘한 데다 색깔도 더 짙다. 다행이다. 애쉬로 애써 작업했는데 뉴송(뉴질랜드산 소나무)이나 미송(미국산 소나무)으로 오해받으면 속상할 것 같다.


오늘같이 특별히 무엇을 만들지 정하지 않은 날에는 나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기만 한다. 대신 머릿속은 바빠진다. "첫날'을 떠올리며 가상의 이미지를 앞뒤 좌우로 돌려가며 3차원 입체모양을 상상한다. 이런저런 형상이 그려지다 구겨지고 다시 불러오고 그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거?' 하는 순간이 온다.



변재(sapwood)와 심재(heartwood)

나무를 수평으로 잘라보면 가운데 진한 부분이 있고 가장자리 쪽으로 연한 부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의 색이 진한 부분을 심재(心材)라 하는데 가장자리 쪽의 변재(邊材) 보다 더 단단하고 변형도 적다. 변재는 심재보다 무르다. 나무에 따라 심재와 변재의 색이 뚜렷한 차이가 나는 종류도 있고, 구별이 힘들 정도로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대개 심재가 변재에 비해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도 비싸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14일 오후 04_48_26.png




주문을 받아 특정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 아닌, 나무를 올려놓고 뭘 만들어볼까 하며 생각에 빠지는 것은 꽤나 행복한 순간이다. 창세기 1장 3절 Dixitque Deus: "Fiat lux".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를 떠올려 본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첫 언급으로 기록된 것이 "빛이 생겨라...."였으니 물푸레나무로 조명을 만들기로 한다. 북유럽신화 속 태초의 나무로, 기독교 성경 속 하느님 최초의 말씀을 합쳐보기로 한다. 그렇게 오늘은 알프스 산맥을 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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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물푸레나무)를 반으로 잘라 양쪽에 덧대고 앞쪽에 아크릴판으로 라인조명이 새어나오게 했다
KakaoTalk_20240212_083324546_04.jpg 텅스텐(색온도 3000도) 조명으로 삽입했다. 밤에는 텅스텐 색깔이 좋다.


앞면 투명아크릴을 끼워 넣어 라인조명이 나오게 하고, 바닥 쪽을 조금 띄워 바닥으로도 빛이 반사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만들고 나니 아쉬운 점이 여러 군데 보인다. 특히 내부에 삽입한 조명이 약해 조도를 한번 더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좌우의 받침대 디자인도 한번 더 고민해야 했다. 아쉬움은 남지만 처음 시도해 본 것으로 만족한다.


현재 이 조명은 아들방 침대 머리맡에 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형광등 켜기엔 너무 밝고 책상 등을 켜놓기엔 끄러 가기 귀찮을 때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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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지나 들여다보니 아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혹시 아들이 효도삼아 가져가 놓고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확인하기도 서로 멋쩍다.

원래 모든 게 기획의도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라 혼자 자위하기로 한다.

"처음 한다"가 꼭 "잘한다"는 아니니까... 만약 그랬다면 난 "최초"보다 "최고"를 더 좋아했겠지... 하며...




'처음'은 설렘이 있다. '처음'이 주는 두려움도 있다.

처음이 설렘이 더 많다면 즐거운 일이 될 것이고, 두려움이 더 많다면 즐기기 어려워진다. 돌아보면 지난 반세기 난 처음에 두려움보다 설렘을 더 얹으려 노력한 것 같다. 내 남은 인생에서도 새로운 "처음'들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만끽하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 자전거 타던 날을 떠올려본다.

뜀박질보다 빠른 스피드에 설레기도 하지만 옆으로 쓰러져 다칠 것 같은 두려움도 동시에 느낀다.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떠올린다. 자전거는 탈 줄 알고 나서 타는 게 아니라 일단 올라타야 탈 수 있는 거라고....


짧은 인생이지만 앞으로 또 찾아올 "처음"들을 기대하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에 기대 장수하기로 한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봐야 한다.
Um zu erkennen, wie kurz das Leben ist, muss man lange l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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