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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된 날

예수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는 무슨 나무였을까?

by 도시 나무꾼 안톤

나이 50이 넘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동네 뒷산 사찰에서 고등부 회장으로 목탁을 치며 법회를 진행한 적도 있었지만 대학 입학 후에는 종교 없이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았다. 3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세계로 인도하려 했지만 난 꽤 단단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다 50대가 돼서 '느닷없이' 가톨릭신자가 되었다. 그래서 난 지금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는 가톨릭 신자다.


일요일에 남편과 같이 성당 가는 게 내 꿈이었어


신혼 초부터 아내가 하던 말이다. 이 말이 지난 25년간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게 뭐라고 아내가 소원이라는데 못 들어주겠나' 하는 마음이 늘 있었다. 반세기 이상 꿋꿋한 무신론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자가 된 후에도 신심이 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벌인 나름의 큰 사건이었다. 하느님보다 아내가 가까우니까.

실제로 예비자 교리반에 있던 남성들은 거의 모두 "와이프를 위해서" 혹은 "아내가 가라 해서" 참여했고, 심지어 미혼인 남성은 "여자친구가 가라 해서"라고 답해 첫 만남에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대개 교인이 아니면 성경 자체보다는 성경에 대한 해석들만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 원문을 한 번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묘한 채무감이 늘 있었다. 예비자 교리수업을 하면서 성경 전체를 일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큰 소득이었다.


난 성경을 볼 때 한글 천주교 성경, 영어성경(NAB: New American Bible), 라틴어성경(Vulgata) 그리고 모니터에 띄워놓은 구글 위성지도를 같이 본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따라 현재의 구글지도에 맞춰 보면 마치 '그때가 느껴질 듯 나만의 생생함'을 느끼게 된다. 번역본의 다른 언어를 같이 보며, 해석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구약은 히브리어가, 신약은 그리스어가 원문이긴 하지만 두 언어 모두 문외한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불가타(Vulgata) 라틴어 버전을 택했다.


지도를 같이 보면...


마태복음 17,1-9와 마르코복음 9,2-10 그리고 루카복음 9,28-36에 나오는 내용에는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예수님은 "해처럼 빛나는 얼굴과 빛처럼 하얀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구절이 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갈릴레아 호수 주변 뒷산처럼 느껴지는 산이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카파르나움(Capernaum)에서 약 25km 떨어진 타보르(Tabor) 산이고 지금 산 정상에는 성경구절에 맞춰 건립된 '거룩한 변모기념성당'(Church of the Transfiguraion)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생각에 빠진다. 설마 설교 후에 25km를 산책처럼 걸어 다녀왔다고? 지도에서 '스트리트 뷰' 기능을 돌리며 길을 따라가 본다. 성경에는 '높은 산'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둥글넓적한 낮은 산'으로 평지에 솟아올라 '작지만 눈에 띄는 산'임을 알게 되고, 산 정상의 성당도 둘러본다. 이렇게 방구석 순례를 위성지도/스트리트 뷰와 함께 한다.


왼쪽은 야트막한 타보르(다볼)산. 카파르나움에서 설교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랐다는 타보르산까지 (구글위성지도) "멀다"


또 신명기 34장 4절에 하느님은 느보(Nebo) 산 정상에서 예리코(여리고)를 내려다보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동족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해 40년을 광야에서 생고생하며 드디어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었는데 모세에게 '너는 못 들어간다'라고 하다니... 모세 입장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맙소사!!!"를 외칠 지경이다. 하느님에 대한 배신감도 이만저만 아니겠지만 모세는 결국 순명으로 받들고 젊은 여호수아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한다.


구글맵의 스트리트 뷰로 캡처한 느보(Nebo)산 정상의 모세기념 조형물. 멀리 아래편쪽에 예리코(여리고)가 있다.


구글맵 이미지이긴 하지만 느보(Mt. Nebo) 산 정상아래로 아련히 내려다보이는 예리코(여리고) 사진을 보면 마치 당시 모세의 감정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사해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사진을 한참을 보게 된다. 현재 요르단 영토인 느보산 정상엔 모세기념성당(Memorial Church of Moses)이 서있다.


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새로운 스토리가 생성된다.

예수님이 설교 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타보르(Tabor) 산에 오를 때는 갈릴레아 호수의 카파르나움(Capernaum)이 아니라 타보르산 바로 옆에 있는 나사렛에 있었을 것이라 성경과 다르게 주장해 볼 수 있고, 늙은 모세는 예리코(여리고)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의 쿠데타나 자연사에 의해 실각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유대인 출신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신교>(Moses and Monotheism, 1939)라는 책에서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는 가설을 내기도 했다. 모세(Mose)가 이집트어로는 '아들' 혹은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가톨릭과 나무는 나에게 비슷한 시기에 왔다.

목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비자 교리를 아내와의 의논도 없이 '내 손으로' 등록하고 가톨릭 신자가 된 것. 지난 50여 년 동안 부정하던 신(神)이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얼떨떨하다. 집안의 우환으로 아내도 냉담자가 되어가고 있을 즈음, '남편을 통해 종교생활을 되살려 성가정을 이루라'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아무튼 아내는 무척 놀라며 반가워했고 이제는 일요일 아침에 성당을 같이 간다. 덕분에 난 아내의 소원을 이루어준 남편이 되었다.


목공과 함께 온 가톨릭이라서, 자연스럽게 나는 성경 속 나무들에 관심을 갖는다.

라틴어, 영어, 한국어로 이어지는 성경 번역을 읽어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나무의 한국어 번역에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유독 성경에 나오는 나무 부분에서는 더 자세히 길게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기면서 번역상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곤 한다. 작은 관목보다는 목재로 쓰일만한 교목을 위주로 본다. 이번 글에서는, 기록에 없지만 궁금한 것과 나무 번역이 이상해 보이는 부분을 소개해보려 한다.


교목(喬木, Tree)과 관목(灌木, Shrub)

교목은 하나의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8m 이상 위로 곧게 자라는 나무. 참나무, 소나무, 은행나무처럼 '큰 나무'라고 부르는 것들. 교목은 보통 수십 년 이상 자라며, 숲에서 우거진 수관층 형성.

관목은 줄기가 땅 가까이에서 여러 개로 갈라지며, 크기가 작고 키가 낮은 나무. 진달래, 개나리, 철쭉처럼 관상용이나 생울타리로 자주 심는 식물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는 무슨 나무였을까?


첫 번째 궁금증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럴듯한 대답'이 많은 질문이다.

한국의 개신교 일각에서는 '산딸나무'라는 주장이 있었다. 또 스코틀랜드 일각에서는 '사시나무'라는 주장도 있다.

산딸나무는 직경이 50cm까지, 높이는 12m 전후까지 자라는 낙엽-활엽-교목이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처형하는 십자가로 사용되었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원산지가 한국과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산딸나무라는 주장이 나왔던 것일까?


왼쪽은 우리나라의 산딸나무, 오른쪽은 미국의 꽃산딸나무의 꽃이다. 4월에서 5월경 꽃이 십자가 모양으로 핀다.

4~5월경이면 꽃이 만발하는데 십자가 모양으로 4개의 꽃잎이 핀다. 미국의 꽃산딸나무는 4월로 벚꽃시즌이 끝날 때쯤, 하얀 우리나라 산딸나무는 5월로 이팝나무 꽃이 질 때쯤 꽃이 핀다. 세상을 뒤덮는 꽃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소란스럽지 않게 내세운다.

예수님이 이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주장은 꽃이 십자가 모양으로 핀다는 것이 주된 근거인 듯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렵다. 스코틀랜드 일각에서 사시나무를 주장하는 것은 '(사시나무 떨 듯) 잎을 떠는 모습'에서 유래한다. 예수님을 못 박았으니 죄인이 되어 벌벌 떤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라고 한다. 이런 억지스러운 연결은 종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 나무를 추정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예루살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일 것
둘째, 직선으로 곧게 자랄 것
셋째, 비교적 저렴하고 가벼운 나무일 것


죄인을 처형하는 나무에 가격이 비싼 고급나무 혹은 수입목을 사용할 가능성은 적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에 넓게 분포하는 흔한 나무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사람 키보다 높은 십자가를 만들려면 직선으로 자라는 부분이 꽤 높은 교목일 것이고, 큰 부피 비해서 가벼워야 장정 한두 명이 들고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나무로 도시 나무꾼은 '사이프러스(측백나무)'를 제안한다. 여러 종류의 사이프러스 중에서도 Italian Cypress(이태리 편백)을 지목한다. (2018년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지중해쿠프레수스'로 검색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사이프러스(측백나무)

남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라는 사이프러스(측백나무)는 라틴어 학명의 Cupressus가 원산지인 지중해의 키프로스 섬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키가 25~45m까지 자랄 정도로 크고 향이 강하다. 나무의 폭이 좁아 그늘을 드리우기는 어렵지만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 수 있어 땅의 경계를 긋는 데 사용되어 온 나무다. 또 기건비중(수분 12%기준)이 0.54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나무다.

지중해 인근 이태리편백(Italian Cypress)의 라틴어 학명은 Cupressus semperviren으로 “항상 살아있는”이라는 뜻인데 역설적으로 ‘장례식 나무’로 유명하다. 좁고 키가 큰 형태로 인해 그리스/로마 시기에 묘지간 경계를 짓는 묘지수로 많이 이용되었고, 인도의 화장 장작 중 시체의 냄새를 완화하는 용도로 사용되며, 중국 제갈량의 묘지에도 사망했던 나이 54세를 따라 측백나무 54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중 절반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국과 일본으로 오면 같은 측백나무과인 편백나무가 서식한다. 우리에겐 히노끼(ひのき)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의 지목에 노르웨이 화가 뭉크(Munch)가 동의했을 리는 없지만, 그의 <골고다 언덕>(Golgotha)이라는 그림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왼편 뒤로 길쭉한 사이프러스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에드바르 뭉크의 <골고다 언덕>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고 각자 자신의 고통에만 귀기울이는 듯 보이는 느낌을 보여준다. 여기서 골고다 언덕은 "희생과 구원의 언덕" 아니라 “무관심의 언덕”이 된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는데, 십자가 좌측 멀리 보이는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는 부활의 희망을 보여준다기보다 무관심 속 '완전한 죽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네덜란드 화가 고흐도 생애 마지막에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나무가 사이프러스(측백나무)다. 하늘로만 쭉 뻗어 올라 돋보이는데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사이프러스에 고흐는 자기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에 본인의 그림이 물감값보다는 높아지기를 간절히 희망했던 고흐니까...

고흐의 사이프러스 사랑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고흐가 사망하기 1년 전의 편지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그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다보면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운 선과 균형을 가졌다. 그리고 그 푸름에는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1889년 6월 25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Road with Cypress and Star) 1890

학명의 뜻이 "항상 살아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사이프러스지만 늘 죽음과 가깝게 있다. 죽음을 잊지 못하는 운명의 사이프러스가 '항상 살아있다'는 뜻이라니 운명의 장난 같다. 죽음 앞에서야 가장 강하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생각나게 한다. 죽음은 원래 생명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공동번역성서 전도서 1장 2절).”에 따른 17세기 유럽의 바로크시대 대표적인 라틴어 경구

라틴어 ‘vanitas’ (영어 vanity)는 허무, 무상.
바니타스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기본 주제로 해골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바니타스 정물화’라 했음. 인생이 허무한 건 인간이 죽음 앞에 무력하고, 해골은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재.
‘바니타스 정물화’의 핵심은 ‘메멘토모리(memento mori)’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 뒤에는 ‘신이 주신 삶의 순간, 지금 현재를 맘껏 살고 즐기라’는 심오한 메시지가 포함, 즉 카르페디엠(carpe diem)하라는 것!!




노아의 방주를 만든 나무는 전나무? 잣나무?


다음은 번역의 문제다. 창세기 6장 14절에는 노아가 대홍수를 대비해 만든 방주가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가톨릭은 전나무로, 개신교는 잣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C)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N) Make yourself an ark of gopherwood, equip the ark with various compartments, and cover it inside and out with pitch.


V) Fac tibi arcam de lignis cupressinis; mansiunculas in arca facies et bitumine linies eam intrinsecus et extrinsecus.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영어성경 NAB에는 고페르(gopherwood) 우드라 했고, 라틴어성경인 불가타(Nova Vulgata)에서는 lignis cupressinis라고 써져 있다. 우리말로 하면 가톨릭성경처럼 전나무가 맞을까? 개신교성경처럼 잣나무가 맞을까?

전나무와 잣나무는 모두 소나무과(Pinaceae)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노아의 방주를 만든 나무를 '사이프러스(측백나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실제로 지중해주변을 비롯한 유럽전역 사이프러스(Cypress)의 학명이 Cupressus로 시작한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대부분이 라틴어성경과 유사한 Cupressus를 학명에 사용한다.


<아라랏산의 노아의 방주> 시몽 드 밀, 1570

가톨릭 성경에서 번역하는 전나무는 영어로 Fir고, 개신교 성경의 잣나무는 Pine으로 두 나무 모두 소나무과(Pinaceae)에 속한다. 측백나무과(Cupressaceae)인 사이프러스와는 거리가 있다. 즉, 우리말 성경은 과(科, Family)가 다른 나무로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중해 인근의 사이프러스의 별명중에 Evergreen Cypress도 있는데, Cypress보다 Evergreen(사시사철 푸르른)이라는 단어에 더 집중하고 사철 푸른 나무를 우리 땅에서 찾다 보니 전나무나 잣나무가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이런 혼선은 히브리어 원문의 브로쉬(ברוש)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분했기 때문이다. 브로쉬는 특정 수종을 뜻하는 단어였다기보다 역사적으로 사이프러스(측백나무),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를 통칭했다고 한다.

나는 불가타(Vulgata) 성경에서 cupressinis로 적은 것을 따라 '사이프러스'(측백나무)를 지목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발도르차 평원의 사이프러스(측백나무).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집 / 구글 스트리트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 포도원 길 옆으로 길쭉하게 늘어서 있는 나무가 사이프러스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 코모두스가 정적인 주인공 막시무스의 가족들을 처형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는 장면에서 길 양옆으로 길쭉길쭉 솟은 나무들이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혔던 십자가의 나무나 노아가 대홍수를 준비하기 위해 만들었던 방주의 나무는 모두 사이프러스(측백나무)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목재로써 사이프러스는 그리 단단한 녀석은 아니다.

'이태리 편백'이라 불리는 Italian Cypress는 얀카지수가 560에 머무르고 있어 상당히 무른 나무에 속한다. (나는 1,000보다 높으면 꽤 단단한 나무로 본다). 함수율 12% 상태의 비중도 0.54로 가볍다.

단단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지만 내수성, 내구성, 항균성이 높아 건축재로 사용하면 오래 버틸 수 있다. 7세기에 지어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나라현의 호류지(法隆寺, ほうりゅうじ, 법륭사)가 편백나무(Japanese Cypress, 히노끼)로 만들었다. 목재의 표면이 매끄럽고 향이 좋기 때문에 니스나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채, 원목 그대로 가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히노끼(扁柏, ひのき, Japanese cypress)라고 불리는 일본산 편백나무로 펜트레이를 만들어봤다. 첫 느낌은 매우 가볍다는 것, 쉽게 잘리고 갈린다는 것, 매우 매끄럽고 색은 희멀건하다는 것 정도다. 작은 소품과 가구위주로 만드는 나같은 소목(小木)에겐 너무 가벼운 느낌이 든다. 작은 목공을 하는 소목수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단단하고 밀도가 높고 특징적인 나무를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측백나무과는 소목인 나에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편백나무로 만든 '안토니오 목공' 펜트레이(pen tray). 초기에 만들어본 각인을 넣었다.

편백은 피톤치드(phytoncide) 발산량이 최상위권으로 알려진 나무다. 인간에게는 피톤치드가 몸에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피톤치드는 원래 "살해(殺害)"가 목적인 물질이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과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의 합성어다. 1937년 소련의 생화학자 보리스 토킨(Boris P. Tokin)이 붙인 말인데, 나무 스스로 자연치유를 위해 내뿜는 항균물질로 병원균이나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고 미생물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물질의 기운이 고약해 해충 등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있는 작은 식물까지 무차별 학살한다. 피톤치드의 '치드'(-cide)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의 '사이드'(-cide)와 같은 단어다. 그런 피톤치드가 인간에게는 좋다고 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상하게 '항상 살아있기'를 바라는 사이프러스는 들여다볼수록 "죽음'과 관계가 많다.

생명과 죽음이 다른 몸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무인지도 모르겠다.




감람수는 올리브나무로,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나무로...


이번 글의 기준점으로 잡은 불가타(Vulgata) 성경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원문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 원문을 5세기 초 교황의 명으로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불가타(Vulgata)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지만 사실 대중성보다는 순수성, 엄격성이 더 중요했던 시기에 정통버전으로 교황청에서 내놓은 것이다. 대중성이 목표였다면 굳이 라틴어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초기에 난립하는 해석과 번역이 문제가 되자 "자, 모두 시끄럽고 이게 정통이야. 여기서 벗어나면 혼날 줄 알아"라며 불가타성경이 나왔던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나라 성경은 처음부터 대중성이 목표였다. 박해받던 시기에 쉽게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성경이라고 알려진 <예수성교누가복음젼셔> (1882년 출판)는 1852년에 나온 중국어 신약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선말로 번역하고 나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정하는 방식을 거쳤다.

중국에서 올리브나무를 중국 자생인 감람나무로, 대추야자나무를 중국 자생인 종려나무로 번역했고, 우리가 중국어 성경을 다시 조선어로 번역해 성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올리브나무를 감람나무라 부르게 된 이유도, 대추야자나무를 종려나무라 부르게 된 이유를 알 만 하다.



살펴본 내용 외에도 나무 번역의 아쉬움은 여러 지점에서 발견되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이 정도에서 "일단 멈춤" 한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2편으로 준비할 수도...)




이젠 생각을 멈추고 십자가를 만들어 본다.

퍼플하트(Purple Heart)라는 나무가 있다. 번역하면 보라색 심장일까? 보랏빛 마음일까? 처음 접했을 때 신기해하던 나무 중 하나다. 접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해본 나무의 색깔이다.

멕시코에서 브라질 남부에 이르는 중남미 열대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로, 단단하기로는 2,520 파운드 포스의 경도로 우리나라의 박달나무 급이고 간신히 물에 뜰 정도로 무게도 무겁다. 강도와 비중도 인상적이지만 이 나무는 색깔이 다 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상태로의 나무가 보라색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신비로운 나무로 우리 집 한편에 만들 제단의 십자가를 만들기로 한다.


퍼플하트(Purple Heart) 목재

보라색은 파랑과 빨강을 합친 색이기 때문에 범상한 색이 아니다. '통합'이기도 하고 '대립'이기도 한 결과가 보라색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비로움, 영성, 슬픔이나 죽음과 같은 양면적인 의미도 지닌다. 초월성과 양면성을 보라색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대림절과 사순절에 입는 보라색 가톨릭 사제복도 양면성을 가진 속죄와 회개를 통해 초월을 상징한다고 본다.


대림절 (待臨節, The Advent)
성탄절 준비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 11월 30일 주일부터 성탄절 전날까지 약 4주간

사순절 (四旬節, Lent)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며 지내는 절기


자작나무 십자가틀에 홈을 파 안쪽으로 퍼플하트를 끼워넣었다.


속죄와 회개할 일이 많지 않으면 좋겠지만 산다는 것은 죄의 연속이고 그만큼의 용서라는 생각도 든다.

목공과 가톨릭이 같이 내게로 온 이후, 우리 집내 제단 만들기는 내 몫이 되었다. 지금 아내는 틈나는 대로 집안 제단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나는 아직 같이 기도하기보다는 아내의 기도를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다. 아내가 머지 않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우리집 제단에서 같이 기도하는게 내 소원이야


우리 집 내부의 기도를 위한 제단



목공의 관점에서는 불교의 만자문(卍字紋) 혹은 스와스티카(Swastika)의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꺾인 십자 모양의 무늬 ""보다 가톨릭/개신교의 십자가가 만들기 훨씬 수월하다. 작대기 2개면 만들어지는 십자가는 수난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수월성으로 인해 기독교가 널리 알려지는데 대중적 상징으로도 꽤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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