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않는 아이언우드(iron wood)
목공방에 소낙비가 내린다.
굵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지붕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공방내부가 마치 스피커 통이라도 된 듯 요란스럽다. 중간중간 번개라도 쳐주면 순간 거친 Rock음악이라도 된 듯하다.
그럴 땐 (누가 보면 미친×이라 할 지 모르겠지만) 복장을 최대한 단촐하게 하고 밖으로 나가 다닥다닥 몸에 닿는 빗물을 받아들인다. 몸에 한기가 들어오기 전에 공방 현관 앞에 낡은 의자 하나 가져와 앉는다. 서늘한 빗물의 기운이 피부에 닿는 것이 참 좋다.
나만의 소낙비 파티가 끝나면 가만히 앉아 내리는 비를 따라 시선을 내린다. 잔뜩 비를 맞고 있는 공방밖 나무 각재와 판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장마철에 누가 목재를 밖에 놓고 갔을까? 소낙비를 저렇게 맞아도 괜찮을까?
무심히 보다 보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나무와 물이 싸우면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시간문제일 뿐 늘 물이 이긴다. 다만, 나무의 '불가능한 승리'가 아닌 "가능한 오래 버팀"을 기대하게 된다.
나무는 싸움의 아이콘이 아니다. 서로 햇빛을 놓고 경쟁은 하지만 서로 죽일 듯 싸우지는 않는다. 햇볕이 부족하면 방향을 틀어 자란다. 빽빽한 숲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무들 사이에 계약이라도 맺은 듯 빈틈으로 만들어진 묘한 경계를 발견할 수 있다. 침범해 싸우기보다 옆 나무와 적당한 거리를 띄우는 것. 이것을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라고 한다.
모든 숲에서 나타나지는 않고 이유도 정확히 모르지만, 경쟁하면서도 공존하는 나무의 모습에서 배움을 찾는다. 그래서 원효대사가 나무가 부처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무와 나무사이의 '비워진 경계'는 서로 선을 지켜가며 공존하는 생존전략이자 삶의 지혜일 것이다.
먼저 오래 버티는 친구를 보자.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페(Ipe)라는 나무가 있다. 고급 건축물의 건물외벽을 장식하기도 하고, 고급 데크재로도 쓰인다. 빗물과 강렬한 햇살의 날씨를 직접적으로 견뎌야 하는 곳이나 사람들이 발로 밟는 곳에 쓰이곤 한다. 그만큼 '버팀'에 있어서는 최강그룹에 속한다.
기건비중(12% 수분을 머금고 있는 상태에서의 비중)이 1.10이고 얀카지수(Janka Index)가 3,510 파운드포스에 달한다. 쉽게 말하면 무거워서 물에 가라앉을 정도고 단단하기도 현존 목재중 최고 수준이다. 극도로 단단하고, 치밀해서 목공작업도 꽤나 까다롭다.
목재의 경도를 측정하는 지수로, 1906년 오스트리아의 가브리엘 얀카(Gabriel Janka)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하며 목재의 눌림 및 마모 저항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다.
직경 11.28mm (0.444인치)의 강철구를 목재에 절반의 깊이까지 눌러 넣는 데 필요한 힘을 측정한다. 직경은 정확히 100 mm²의 면적을 가진 원을 만들기 위해 선택된 것.
일반적으로 파운드 포스(lbf) 단위로 표시하며 킬로뉴턴(kN) 또는 킬로그램힘(kgf) 단위도 사용한다.
바닥재(flooring) 선택 시 특히 유용하다. Janka 지수 값이 높은 목재는 스크래치나 눌림에 강해 상업 건물이나 통행량이 많은 공간의 바닥재로 적합. 대체로 1000파운드 포스(lbf)가 넘으면 꽤 단단한 나무에 속함.
목재의 강도를 표현하는 다른 접근들도 있다. Modulus of elasticity (탄성계수 또는 탄성률), Modulus of rupture (파괴계수 또는 굽힘강도), Crushing strength (압축강도 또는 압축내력) 등이 있고 각각의 1위는 다른 목재지만 일반인에게는 너무 전문적이어서 '목기시대' 연재에서는 얀카 지수로 통일한다,
미국 뉴욕의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 해변가 인도 발판으로 사용되었고, 교체되기까지 25년이나 햇빛과 비바람, 눈과 추위를 버텨냈다고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혹자는 ‘현존하는 최고의 목재’로 이페를 지칭하기도 한다. 기능적으로는 최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엔 목재와 플라스틱을 혼합해 만든 합성목을 데크재로 대신 쓰는 경우가 많다. 가격이 원목보다는 많이 저렴하고 내구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합성목이 많이 나타날수록 이페는 더욱 '고급' 건축물의 외관을 장식하는 나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페(Ipe)는 중남미가 원산지이지만 주로 브라질산을 수입해서 목재상끼리는 브라질 월넛(Brazilian Walnut)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라파초(Lapacho), 베네수엘라에서는 뿌이(Poui, Puy), 그리고 볼리비아에서는 타히보(Tajibo, Taheebo)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처럼 이름이 많다는 것은 대체로 이 지역에서 의미가 깊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즈(Santa Cruz)市에는 가로수로 심겨 있다. 특이한 것은 7월엔 분홍이나 보라색 꽃이 피는 나무가 있고, 8월엔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녀석이 있다. 그리고 그 겨울의 끝엔 하얀색 꽃을 피우며 마무리하는 나무도 모두 이 녀석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진달래, 개나리, 목련을 한 자리에 모은 것 같다.
난 이페(Ipe)를 볼 때마다 생기는 의문이 있다.
기능적으로는 최고의 목재라고까지 일컬어지는데 왜 가구공예나 작은 목공예에는 이페(Ipe)가 드문 것일까? 가구를 만들기엔 너무 무겁고, 깎아내기엔 너무 단단해서일까? 왜 비바람을 견디며 뜨거운 햇볕은 버텨내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아래 눌리는 험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일까? ‘잘난 놈의 저주’일까?'스스로 원한 수난'일까?
볼리비아의 전설에 그 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아주 먼 옛날 신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나무들에게 언제 꽃을 피울지 선택하라고 했다고 한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며 살던 나무들이 신이 선택권을 주니 신이 났다.
“저는 싱그러운 봄이요”
“찬란한 여름이 제일이죠”
“저는 가을이 좋아요” 등등
그런데 신이 아무리 기다려도 겨울을 고르는 녀석이 없었다.
“나는 추위와 맞설 용기를 가진 그리고 겨울을 빛내줄 나무가 적어도 하나는 있었으면 한다. 누구 없는가?”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나무가 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제가 하겠습니다”
신이 기뻐하며 물었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저는 타히보(Tajibo)라고 합니다”
다른 나무들은 겨울에 꽃을 피우겠다는 무모함에 혀를 끌끌 찼다.
신은 타히보에게 말했다.
“너는 내 요구에 기꺼이 응했으니 선물을 주겠노라. 겨울에 꽃 피우는 대신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을 피우게 하리라.”
모든 나무가 피하고 싶은 겨울을 선택한 품성은 지금도 바닥재와 외장재로 쓰이고 있는 것과 묘하게 연결된다. 목재 최고 수준의 기능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나무들이 꺼리는 야외와 바닥을 책임지고 있다. 목재로써 지나치게 튼튼해서 벌어진 결과겠지만...
이페(Ipe)를 신이 여러 가지 색깔로 꽃 피우게 해 줬던 것처럼 이 나무로 다른 것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난 오늘 하루, 신이 되어보기로 한다.
잘 휘지 않고 잘 구부려지지 않는 나무의 위상에 맞지 않게 이페를 너무 홀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오기가 발동한다. 사람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뒤틀리기 마련인데,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싶을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본다.
단단하고 굳건한 표상으로 우리는 아이언(iron)을 곧잘 가져와 쓴다.
역사에는 '철의 여인'도 있었고, 영화에는 '아이언 맨'도 있다. 나무 중에도 별명으로 “Iron”이 들어가는 나무가 꽤 있는데 이페 또한 아이언 우드(iron wood)중 하나다. 나무에 대한 칭찬이긴 하겠지만 굳이 나무에 아이언(Iron)을 붙이다니 조금은 생경하다. (아이언 우드라 불리는 나무들은 단단한 나무 Top10 편에 소개 예정)
공방장이 내가 처음 공방 회원이 됐을 때 했던 말이 있다.
나무를 이해하려고 해 봐.
갈라지고 휘어지는 것이 나무의 본성이야.
나무는 버티고 버티다가 자기 본성에 따라 할 뿐이거든...
그 나무의 본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목수야.
본성을 알아보지 못하면 목수라 할 수 없지
하지만 나무의 갈라지고 휘어지는 본성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휘어진 목재를 맞닥뜨리면 짜증이 먼저 올라온다. 언젠가 사놓은 비싼 나무를 꺼내었는 데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려있는 것을 보게 되면 뒤통수가 아프다. 목재의 양면을 갈아내는 이른바 '평을 잡는' 작업부터 해야 하고 평을 잡고 나면 목재의 두께가 얇아지기 때문.
그런데 이페는 잘 휘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는다. 가장 ‘나무 같지 않은 나무’라고 해야 할까? 워낙 변형이 없고 균열도 적은 데다 단단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래서 일부 목재상들 사이에서는 ‘현존 최고의 나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흔들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장 붙잡고 싶을 때는 '기도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위해 올리브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도하는 손 모양을 흉내 내고, 십자가 형상은 뒤편에 놓인 불빛이 새어 나오며 나타날 수 있도록 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앞두고 머물렀던 '감람산'이 사실은 올리브산이고 영어로는 Olive Mountain이기 때문에 의미도 있어 보였다. (도시나무꾼은 그렇게까지 독실하지는 않다...) 십자가를 만들 때는 잘 휘어지지 않고 잘 갈라지지 않는 아이언 우드(iron wood) 계열로 작업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는 지인이 긴 순례를 함께 할 "Mobile 십자가"를 주문했다.
무겁거나 커서도 안되고, 고행 같은 길에 십자가 본체는 상하지 않도록 앞뒤로 커버가 필요했고, 순례자의 작은 가방에 쏙 들어가야 하는 사이즈로 만들어야 했다. 또 마지막으로 커버의 전면에는 의뢰자의 세례명이나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레이저 각인으로 새겨 넣었다.
한 두 개 만들어봤던 것을 SNS에 올렸더니 주문의뢰가 적잖이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나무도 제각각 올리브나무, 박달나무, 보고테 등등이지만 단단하고 밀도가 높은 나무들로만 작업했다.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순례길에 나서는 신자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에 이번엔 이페로 만들어 보기로 한다. 이페가 가구나 목공예에는 크게 쓰이지 않았던 것은 무늬의 개성이 너무 없어서 일 것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밋밋하다. 마치 봉쇄수도원에 어울릴 것처럼...
지극한 단순함과 지극한 단단함은 비바람이 부는 거친 순례길에도 변하지 않을 순례자의 마음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먼저 이페를 잘라 십자가 커버 겸 받침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넓게 홈을 파내고 뒷 판은 작은 초를 올려놓을 수 있는 위치를 만든다. 내부 십자가는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처럼 촛불이 통과할 수 있도록 두 조각으로 만들었다. 순례 중 어디서든 모두 펼치면 작은 성당이나 교회가 되도록, 모두 합치면 나무토막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순례자용 십자가를 들고 먼 길 나서면 순례자의 마음도 단단하고 튼튼할 것이라 믿어본다. 나무지만 아이언 우드(iron wood)라 불리는 것들이니까...
오락가락하던 소낙비가 그쳤다. 공방밖의 나무는 이제 햇빛을 감당해야 할 차례다.
우리는 안다. 제 아무리 아이언우드(iron)라 불려도 아이언이 녹슬듯, 결국 나무는 빗물과 햇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변하기 않기 위해 버티기보다 공방장의 말대로 '갈라지고 휘어지는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순례는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보다 순례자에게 주어진 본성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닐까...
갈라지고 휘어지는 나무의 본성을 받아들여야 진짜 목수가 아니던가.
예수님도 목수가 아니었던가.